[여소야대④]2000년 4·13 vs. 2016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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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④]2000년 4·13 vs. 2016년 4·13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4.17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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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만의 여소야대...2000년과는 달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끈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 뉴시스

2016년 4월13일 치러진 20대 총선은 2000년 4월13일 있었던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지형을 낳았다. 그러나 16대 총선과 20대 총선은 4·13이라는 숫자와 여소야대라는 결과만 같을 뿐, 원인이나 예상되는 파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르다. <시사오늘>에서 2000년의 4·13 총선과 2016년의 4·13 총선을 비교·분석해 봤다.

영남의 한나라 vs. 호남의 민주

16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1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며 133석을 얻은 한나라당에게 원내 제1당 자리를 허용했다. 당시 임기가 1년 반밖에 남지 않았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6대 총선의 여파로 급격히 레임덕에 접어들었고, 이 의석 구조를 승계한 채 출범한 참여정부는 한동안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때의 여소야대는 형성 원인에서부터 지금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의석수가 많은 영남을 석권하며 원내 제1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대선에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지역주의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남의 신한국당, 호남의 민주당 구도는 계속 이어졌다.

16대 총선의 여소야대 역시 지역주의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영남권에서, 민주당은 호남권에서 의석을 석권했다. 민주당은 수도권과 호남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강원과 충청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지만 한나라당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강고한 지역주의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상대적으로 의석수가 적은 호남 기반의 민주당은 영남 기반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의 지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반면 20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균열에서 여소야대가 비롯됐다. 의석수가 많은 영남에서 완승, 지역주의 기반의 여소야대가 이뤄졌던 16대 총선과 달리, 이번에는 부산에서 야당의 김영춘·김해영·전재수·최인호·박재호가 당선됐고, 경남에서도 야당의 김경수·민홍철·노회찬이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진보 정치 1번지’ 울산에서도 야당 성향의 무소속 김종훈·윤종오가 총선 현황판에서 붉은색을 걷어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에서조차 야당의 김부겸 및 야당 성향 홍의락 두 명의 당선자가 나왔다. 2000년의 여소야대가 ‘지역주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2016년의 여소야대는 ‘지역주의 붕괴에 따른’ 결과인 셈이다.

이회창 vs. 문재인

여소야대를 이끈 야당 대표의 입지도 판이하다. 16대 총선 직전 한나라당은 이른바 ‘물갈이 공천’ 파동을 겪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김윤환 전 대표, 이기택·조순 전 총재 등 거물 인사들을 공천 배제하자, 이들은 즉각 탈당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한나라당과 영남권에서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실제로 민국당은 선거 초반 ‘사천(私薦)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돌풍을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민국당이 이 총재의 대권 가도에 결정적일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총재는 내홍을 수습하고 영남에서 완승, 리더십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기 사람들을 대거 원내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며 여소야대 국면을 조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회창 대세론’을 형성한 이 총재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태풍’에 휩쓸리기 전까지 승승장구했다.

반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입장은 애매해졌다. 문 전 대표는 수도권에서의 압승과 부산·경남에서의 선전을 이끌었음에도 야권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 완패하며 야권 유력 대선 주자로서의 입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선거일 닷새 전까지 호남 땅을 밟지도 못했던 문 전 대표는 승부수로 던진 “호남에서 지지를 거두면 정치에서 은퇴하고 대선에 불출마하겠다”는 약속으로 인해 정계 은퇴 압박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번 총선을 통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김부겸 당선자 등 새로운 대권 후보들이 등장하면서 문 전 대표의 대권 가도에 경고등이 켜졌다. 야당을 원내 제1당으로 이끈 야권의 ‘얼굴’이 위기를 맞은 기이한 모양새다.

자민련 vs. 국민의당

제3당의 역할도 다르다. 16대 총선은 제3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쇠퇴가 시작된 계기였다. 15대 총선에서 충청도 정당을 표방, 50석을 얻었던 자민련은 16대 총선에서 17석을 얻는 데 그치며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을 지지했던 충청은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됐고, 자민련은 사실상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6대 총선에서 제 3당이었던 자민련은 여소야대 정국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16대 총선 패배와 함께 급격히 입지가 축소됐다. 총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DJ와 결별한 김 전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향 곡선을 그렸고, 결국 2002년 대선에 출마조차 하지 못하며 쓸쓸히 정계를 떠나야 했다.

반면 2016 총선에서 제3당의 역할을 맡은 국민의당은 이번 여소야대 정국을 만든 주체 중 하나였다. 야권 연대를 거부하며 독자 노선을 선언할 때까지만 해도 국민의당이 야권 표를 ‘갈라먹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문 전 대표는 안 대표를 향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새누리당은 공식 페이스북에 “새누리당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응원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의당이 오히려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중도·보수층을 상당 부분 흡수한 것으로 분석되면서, 더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야에서 죽어도 좋다”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던 안 대표 역시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야권 연대를 거부하고 뚝심 있게 ‘마이 웨이’를 선언한 것은 유약한 이미지를 벗는 데 도움을 줬고, ‘연대 파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은 리더십을 과시하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16대 총선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데 실패하며 쇠락의 길을 걸었던 김 전 총리와는 달리, 안 대표는 20대 총선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한 단계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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