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어린애가 무슨…” 비웃음에 뿌린 통일의 씨앗…1989 ‘임수경 방북 신드롬’
[옛날신문 보기] “어린애가 무슨…” 비웃음에 뿌린 통일의 씨앗…1989 ‘임수경 방북 신드롬’
  • 한설희 기자
  • 승인 2020.10.09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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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6.21. 노태우 정부, 平祝 참가 불허…임수경, 비밀리 동경行
1989.06.28. ‘서경원 入北 쇼크’ 정치권 강타
1989.06.29. ‘임수경 파견’ 밝혀…“6공 책임” vs “전대협 책임”
1989.07.01. ‘임수경 성명’…“한국정부 매도” vs “반공 이데올로기”
1989.07.03. 盧 “밀입북자는 암거래꾼”…任 “프레임 매도”
1989.07.07. 임수경, 南北 청년공동선언…“북한의 정치쇼”
1989.07.25. 문규현 北 파견…任 판문점 귀환 요구 ‘단식 농성’
1989.08.15. 임수경 귀환…“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분단 이래 수많은 정치인들과 각계 인사들이 교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나 임수경 전 의원의 45일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는 남북 양측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서로의 삶을 비교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린 만 스무 살의 여학생, 임수경의 이야기다. ⓒ시사오늘 김유종
분단 이래 수많은 정치인들과 각계 인사들이 교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나 임수경 전 의원의 45일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는 남북 양측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서로의 삶을 비교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린 만 스무 살의 여학생, 임수경의 이야기다. ⓒ시사오늘 김유종

“한 소녀가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1989년. 한 여학생이 정부의 승인 없이 45일간 평양을 방문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당연한 수순으로 정계에선 지탄이 쏟아졌다. 당시 여당 대표였던 민정당 박준규 의원은 그해 6월 12일 “한 소녀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비아냥을 남겼다. 다수의 언론 역시 ‘북의 정치놀음에 놀아난 꼭두각시’, ‘북한의 정치 선전 도구’, ‘나이 어린 생각’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차가운 시선 속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헬기에 수송돼 구속됐다. 

그러나 북한 대중 사회의 저변에선 변화가 움텄다. 그의 파마머리, 그가 입은 청바지와 면 티셔츠, 그리고 거침없는 언행은 북한 청년들 사이에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며 일종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북한 사람들은 “어구구, 용감하긴 한데 쟤네 집은 이제 3대가 몽땅 망했다”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한 정부에서 (그녀를) 불허한다는 소식에 “그럼 그렇겠지. 남조선에서 보자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역적인데 그걸 분계선 통해 넘어 오게 할라고.” 

(중략) 그해 8월 15일, 북한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이날 TV에 머물렀다. (중략) 우리는 모두 슬펐다. 한 달 반 동안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여주인공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끌려갔으니.

(중략) 그런데 TV와 〈노동신문〉에 임수경 재판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리자 서울을 방문한 북한 기자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으로 들이닥친 일이 생겼다. 진짜 가족들이 피해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장면도 TV로 방영됐다. 이 장면이 특히 충격이었다. 가족이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역적’의 집에 그토록 귀한 컬러TV, 소파, 냉장고 등 없는 게 없었다.
-주성하,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2010, 82~85p. 

분단 이래 수많은 정치인들과 각계 인사들이 교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나 단 한 명, 임수경의 45일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당시 〈노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통일의 꽃을 짓밟지 마라.’

이는 남북 양측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서로의 삶을 비교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린 만 스무 살의 여학생, 임수경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이야기다. 

 

1989.06.21. 노태우 정부, 平祝 참가 불허…임수경, 비밀리 동경行


1989년 6월21일 매일경제 2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6월21일 매일경제 2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노태우 정부는 21일 오후 이홍구 통일원장관 주재로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제3차 회의’를 열고 전대협 학생들의 ‘평양청년학생 축전’ 참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 발표한다. 

평축(平祝) 참가 불허

(중략)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문제는 성격이 정치성을 강하게 산(山)고 있는 만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밝히고 남북 대학생간 교류는 체육행사나 조국순례대행진 등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1989.06.21. 매일경제 2면 기사

그러나 이를 인정할 수 없던 전대협 간부들은 논의 끝에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을 대표로 방북시키기로 결정한다. 이에 임수경은 6월 21일 오후 비밀스럽게 서울을 출발, 도쿄에 도착한 뒤 1주일간 체류하게 된다. 

그는 지난 2014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무슨 이유에선지 직전에 참가를 불허했다”면서 “그래서 그동안 준비를 해왔던 사람들이 ‘그냥 가자’고 결정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당시 문교부, 통일부, 대한적십자사 세 군데에서 추진했다. 이들이 공동으로 북한에 대학생 대표단 파견을 추진해서, 대학생남북교류추진위원회 500명이 1988년 12월에 초청장을 받았다.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에서 대한적십자사로 보낸 초청장을 통일부가 우리에게 전달해줬다. 그래서 이듬해 남북대학생교류협력추진위원회가 발족을 하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직전에 참가를 불허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준비를 해왔던 사람들이 우리는 그냥 가겠다, 그렇게 된 거다.

-2014년 9월 23일 〈시사오늘〉 인터뷰

 

1989.06.28. ‘서경원 入北 쇼크’ 정치권 강타


1989년 6월 28일 한겨레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6월 28일 한겨레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임수경에 앞서, 평화민주당(평민당) 소속의 서경원 의원이 유럽여행 중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즉시 구속됐지만, 정치권은 ‘공안 정국’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당시 언론이 ‘입북 신드롬(증후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였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서 의원을 제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지만,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반국가단체 수괴와의 회합”, “주사파의 초법적인 언동”이라면서 강도 높게 비난했다. 파문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29일 DJ를 포함한 평민당 간부로의 ‘검찰 수사 확대’ 및 ‘남북대화 연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서경원 의원 북한 방문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52) 씨가 27일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회합)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됐다. (중략) 서 의원은 지난해 8월 17일 일본에서 열린 세미나 참석차 출국했다가 서독을 거쳐 북한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 의원은 3일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등 한국 가톨릭 교회지도자들의 방북과 교구부활문제 △남파간첩의 즉각 중단과 휴전선에서의 대남 과격방송금지 △군사시설에 대한 양쪽의 개방 합의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북의 '부자세습제'의 재검토 등을 협의하고 베이징을 거쳐 귀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에 따르면 서 의원은 85년 3월 중순 서독에서 만난 정아무개 목사(40세) 소개로 오스트리아에서 북한 파견 요원인 정아무개(50세)씨를 만나 통일논의와 농민교류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중략) 서 의원은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지난 22일 평민당에 알리고 25일 검찰에 자진 출두, 조사를 받은 후 이날 구속됐다. 
-1989.06.28. 〈한겨레신문〉 기사

徐議員(서의원)의 入北(입북)충격

(중략) 이 같이 무책임한 모험주의적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문익환 목사 북행 때보다 더 큰 문제점과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계속된 일부인사들의 북한 잠입이 국가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대북 관계에서 무정부적 행태의 만연을 초래하고 있는 듯한 위기감마저 주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대학가의 평양 축전 참가 강행 움직임과 주사파의 확산 등 사상, 이념 체계의 혼란상이 극에 달해 있는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불법적인 북한잠행은 이들을 고무시키고 전반적인 대북 경계태세를 이완시키는 결과를 빚을 위험성이 높다.

(중략)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 일각에, 특히 일부 재야나 대학운동권에서 기존 질서나 법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초법적인 언동을 일삼고 있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1989.06.28. 〈경향신문〉 사설

내달 예정 南北(남북)대화 연기

정부와 민정당은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을 계기로 안기부, 보안사, 검찰 등의 공안합수기능을 강화, 정치사회 각 분야에 침투해있는 좌경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관련단체 등에 대한 전면 수사에 착수하는 한편,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등 대공 관련 법안에 대한 개정방침을 현재의 국민감정을 고려해 남북 관계 개선과 사회 안정이 이뤄질 때까지 유보키로 했다. 
-1989.06.29. 〈경향신문〉 기사 1면

 

06.29. ‘임수경 파견’ 밝혀…“6공 책임” vs “전대협 책임”


1969년 6월 29일 경향신문 2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9년 6월 29일 경향신문 2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전대협은 ‘서경원 쇼크’로 ‘공안 정국’에 휩싸인 정치권에 다시 한 번 불을 당긴다. 임종석 의장이 29일 밤 한양대에서 발족식을 열고 임수경을 ‘축전 대표’로 평양에 파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이때 경찰이 임종석 의장 체포를 위해 7500여 명의 전 의경 병력을 한양대로 투입해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전대협 ‘평양 축전’ 파견

전대협은 29일 오후 한국외대생 임수경(22여) 씨를 전대협의 공식대표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일본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임씨는 29일 자정께 평양으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대협 임종석 의장은 이날밤 11시께 한양대에서 학생 2천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범국민축전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이 사실을 발표, 대표 파견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중략) 전대협은 이와 함께 "정부는 임씨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하려는 음모를 버릴 것을 촉구한다"면서 임씨가 돌아온 뒤 국회공청회 또는 청문회를 통해 방북활동에 대해 국민적으로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 통일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tv공개토론을 전대협이 참가한 가운데 열 것 등을 제안했다. 
-1989.06.30. 〈한겨레신문〉 1면 기사

운동권內(내) 非難(비난)피하려 極祕(극비) 파견

(중략) 충격요법을 쓴 것은 지금까지 전대협이 벌여왔던 일련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이를 통해 전대협은 평축문제를 둘러싼 정부측과의 줄다리기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어낸 것으로 자평하고 있다. (중략) 전대협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통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을 뿐 아니라 통일논의를 정부가 독점하려는 것으로 비판해왔던 주장을 부각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고 밝히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 후유증은 예상보다 길게 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사건이 현 정국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태로 경색화되고 있는데다, 정부가 재야126개 단체에 좌경세력이 침투돼 있다고 밝히는 등 재야세력에 대한 강경대응을 시사하고 있는 가운데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1989.06.30. 〈동아일보〉 1면 기사

6월 30일자 한겨레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6월 30일자 한겨레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분열된 국론을 반영하듯, 언론 사설 역시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동아일보〉를 필두로 언론들은 ‘좌파’ 전대협의 몰지각한 행동을 비난하며 “북한과 좌경 세력의 음모에 어린 소녀가 희생됐다”는 교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예외적으로 1면에 강만길 고려대 교수의 칼럼을 싣고 “6공 자체의 명백한 통일론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면서 전대협이 아닌 노태우 정부의 강경 대북 정책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全大協(전대협)의 몰지각한 행동

(중략) 남한에 거주하는 4천만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비원을 안고 사는 것은 사실이나 여대생 1명을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보내 북한당국의 대남공작의 마수 앞에 노출시키는 것을 통일운동이라 생각하는 지각없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지 헤아려보라. 학생들의 단순하고 무모한 통일열정이 결과적으로 통일실현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줄 것을 당부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엊그제 터진 평민당 서경원 의원의 입북 사건은 그동안 북한의 대남전략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 촉수가 우리 주변에 얼마만큼 접근해 있는지를 웅변해준다 북한이 안팎의 어려움을 무릅쓰며 평양 축전을 강행하고 우리 측 정부를 상대치 않고 전대협만을 굳이 골라 초청하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저들의 대남공작의 변용된 전략이다. 저러한 음모를 헤아리지 못하고 평양 축전이 무슨 통일운동에 큰 디딤돌이나 되는 양 강변하는 이들 학생들의 미망이 안타까울 뿐이다. 
-1989.06.30. 〈동아일보〉 사설

'6공'의 통일방안을 보여달라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면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론 혹은 유엔 감시하의 북한만의 선거론을, 장면 정권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론을, 박정희 정권은 7·4 공동성명에서 일단 주체적·평화적 통일안에 합의했지만 실제로는 군사·경제·외교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다른 한쪽을 흡수 또는 병합하려는 통일정책을, 전두환 정권은 남북 최고책임자 회담을 가장 핵심적 방안으로 제시하거나 추진했다.

무력통일론이나 유엔 의존안이 실제로 불가능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흡수·병합방법 역시 부지하세월의 방안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옳은 방법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최고책임자 회담안은 엄격히 말해 구체적 방안이라기보다 일종의 분위기 조성 방안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략) 지금 우리 사회는 통일문제를 두고 어느 때보다도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중략) 7·7선언이 나온 지 1년이 되도록 6공 자체의 통일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으며, 이를 믿고 따르려 했던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중략) 통일문제를 두고 목사, 교수, 또 국회의원이 구속되는 이 불행을 수습하는 지름길의 하나는 7·7선언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1989.06.30. 〈한겨레신문〉, 강만길 고려대 교수 칼럼 

 

1989.07.01. ‘임수경 성명’…“한국정부 매도” vs “반공 이데올로기”


7월 1일자 한겨레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7월 1일자 한겨레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임수경은 북한의 격한 환대를 받았다. 마중 나온 500여명의 북한 측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성명서를 통해 “남한에서는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좌경용공세력’으로 몰린다”면서 남한 측의 ‘공안 정국’ 및 ‘색깔론’을 비판했다. 

조국통일에 기여 임씨 도착성명

(중략) 일본 〈교토통신〉은 임 씨가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한학생 5백여 명이 마중 나왔으며 임 씨는 북한여학생 대표와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고 말했다. 한국 학생이 한국전쟁 이후 '망명'의 경우를 제외하고 북한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보도에 따르면 (중략) 임 씨는 이 성명에서 "자동차로 불과 4시간이면 올 거리를 나는 24시간을 비행하면서, 그리고 열흘이라는 시간을 들여 이곳에 도착했다"면서 "이것은 남한정권 이반통일 세력이기 때문이며 진정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좌경용공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남한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1989.07.01. 〈한겨레신문〉 기사

7월 1일자 한겨레 지면 10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7월 1일자 한겨레 지면 10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의 파격적 발언에 한국 언론은 또 다시 “남한 정부를 매도한다”고 비난하는 쪽과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는 1면의 ‘횡설수설’이라는 가십란을 통해 “부모된 입장으로 당황스럽다”면서 “북 체제를 찬양하며 통일 기반을 그곳에서 찾으려는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반면, 〈한겨레〉는 임수경을 향한 정부 여당의 과한 비난을 “반공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면서 “북한에 대한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횡설수설

임 양을 지켜보며 이 땅의 부모들은 당혹스럽다. '아이는 겉을 낳지 속을 낳지 않는다'지만 내 집의 아이들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불안을 떨쳐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아이들을 저처럼 키워내고 있는가. (중략) 그러나 민주화와 반독재를 외치는 학생운동의 끝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반민주적이며 반문명 반인문적인 북의 체제를 찬양하며 통일 기반을 그곳에서 찾으려는 모순에 이르게 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착잡한 감정을 이기기 어려워진다. 
-1989.07.01. 〈동아일보〉 기사

'방북' 다룬 시사토론 균형 돋보여

서경원 의원과 임수경 씨의 북한방문 관련보도를 보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기라도 할 것처럼 요란하여 반공 이데올로기에 따른 불안과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중략) 그러나 북한 방문 사건을 단순하게 실정법 위반이라는 차원 또는 매카시즘의 시각에서 매도 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를 표명한 7·7선언이 나왔을 때, 국민들은 이를 환영해 마지않았으며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고 실질적 통일 노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89.07.02. 〈한겨레신문〉 기사

 

1989.07.03. 盧 “밀입북자는 암거래꾼”…任 “프레임 매도”


7월 3일자 동아일보 지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7월 3일자 동아일보 지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노태우 대통령은 3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경원 의원와 임수경 등 잇따른 밀입북을 두고 “도둑”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맹비난했다. 

"密入北者(밀입북자)는 암거래꾼"

노태우 대통령은 3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임수경 양 등의 잇따른 밀입북과 관련, "대문으로 다니지 않는 자들은 도둑"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당사자들과 북한을 맹비난했다. 
-1989.07.03. 〈동아일보〉 기사

이에 임수경은 의원 재직 시절인 지난 2014년 본지와 만나 “밀입국 논란은 매도”라면서 “감추는 것 하나 없이 북한과 외신 기자들이 모두 생중계 했다”고 반박했다. 그녀는 ‘밀입국 매도’는 ‘일종의 프레임’이라면서 “(보수 측이) 남북 평화 움직임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밀입국이란 건 매도다. 강화도나 삼척 이런 데서 잠수정을 타고 들어와서 비밀리에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거나, 혹은 몰래 국경을 넘는 것, 그런 게 밀입국이다. 우리나라 여권 받아서 비행기 타고 베를린 가서, 그 다음엔 동베를린에서 평양 가는 비행기로 입국했다. 트랩 내려오는 순간부터 NHK를 비롯한 외신 기자들이 생중계했다. 그리고 축전 참가 후 올 때는 판문점을 거쳐서 귀환했다. 그게 어떻게 밀입국인가. 그런데 밀입국 같은 매도를 덧씌워 의미를 축소했다. 분단을 통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사람들에겐 아마도 타격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다 공개됐다. 비밀이 하나도 없다. 북한도 9시 뉴스를 한다. 9시 20분까지는 임수경 동정이 나오는 거다. 북한에서 45박 46일 있었다. 꽤 장기간이니까 매일이 전부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데 돌아와서 안기부 조사를 받는데, 이미 전부 내 일정을 써 놨다. 연설 라이브도 다 녹취하고, 라디오에 다 나오고, 내가 기억이 안 나면 조사관이 ‘너 이때 어디 가서 무엇을 했잖아’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아, 맞다’,‘그렇다’고 오히려 내가 맞장구쳤다.” 
 

-2014년 9월 23일 본지 인터뷰

한편, 임수경의 행보를 두고 전대협이라는 조직적 특성에 주목하는 언론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방북 논란 이후 ‘전대협과 학생운동’이라는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이들은 ‘전대협의 실세’, ‘전대협의 호칭(특수용어)’, ‘전대협의 서열문화’ 등을 심층 취재하면서 “학생운동 조직에 청산해야만 할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전대협은 임수경 양의 평양축전 참가에 이어 북측에 동조한 남북학생 공동선언문 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또 한 번 국민을 놀라게 했다. (중략) 많은 국민들은 최근 전대협의 몇 가지 행태를 보고 실망과 비탄의 맘을 금치 못하고 있다. (중략) 민주화시대를 맞아 우리 국민들이 청산해야 하는 제1과제는 30년에 가까운 군사문화의 잔재이다. 국민 의사를 외면한 채 모든 국정이 밀실서 꾸며지는 공작정치 문화가 횡행했던 것이 전 시대의 관행이었다. (중략) 학생운동도 이 같은 대원칙에 따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통일운동은 더욱 그러하다. 
-1989.07.06. 〈동아일보〉 사설

 

1989.07.07. 임수경, 南北 청년공동선언…“북한의 정치쇼”


임수경 방북 당시 사진. ⓒ임수경 제공
임수경 방북 당시 사진. ⓒ임수경 제공

7월 7일, 평축의 날이 밝았다. 임수경은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대표인 김창룡 위원장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 서명한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일반론적 내용을 담은 이 성명문은 내용만을 놓고 볼 때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상 “우리는 어깨 걷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진군하자”는 평범한 내용에 가깝다. 

남북 청년공동선언 발표

양쪽은 이날 채택한 공동선언문에서 "조국 통일이 북남의 청년들의 삶과 투쟁의 최우선적 목표"라고 전제,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남북 불가침 선언 채택 및 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하며 △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 등 두개 한국정책을 반대하고 △오는 95년까지 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선언했다. 

공동선언문은 또 △남북의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 인정, 민족대단결 원칙을 기초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싸우며 △남북당국자 사이의 대화와 민간 수준의 다각적 교류 협력을 활발히 추진하고 △매년 한차례씩 남북학생간 정기적 교류를 갖는다고 밝혔다. (중략) 공동선언문에는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씨와 김창룡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이 각각 양쪽을 대표해 서명했다.
-1989.07.08. 〈한겨레신문〉 기사

한편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평축은 지상 최대의 정치쇼”라며 “한국은 운동권의 실체와 안보의식의 해이만 남겼을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平祝(평축)이 남긴것

(중략) 외신이 한결같이 전한 평축 결산 논평을 보면 평축은 한마디로 축제와는 거리가 먼 지상최대의 ‘정치쇼’였다는 결론이 났다. 사회주의 및 제3세계 국가 간의 친선, 스포츠, 문화 교류 등은 완전히 제쳐놓고 오로지 반제, 반핵, 반한의 정치행사로만 시종일관함으로써 세계의 빈축을 샀다. (중략) 통일이 안되는 것은 모두 남한과 미군 때문이라는 식으로 축전 참가자들에게 충동질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중략) 끝으로 평축이 우리에게는 무엇을 남겼는지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임 양의 밀입북과 전대협의 친북 노선 등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운동권의 실체를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이렇듯 북한 정치공작에 놀아날 정도로 우리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는지 깊은 자책과 반성이 있어야겠다.
-1989.07.10. 〈경향신문〉 사설

 

1989.07.25. 문규현 北 파견…任 판문점 귀환 요구 ‘단식 농성’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모습. ⓒ임수경 제공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모습. ⓒ임수경 제공

김승훈 신부를 대표로 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임수경의 ‘판문점 귀환’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한다. 

임수경은 정전협정 기념일인 7월27일 귀환하길 원했으나, 정부가 이를 허용하지 않자 판문점 북쪽 지역인 통일각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단식이라는 항의 방식은 당시 북측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이에 평양 축전 참가자와 북쪽 학생 100여명이 ‘동조 단식’을 벌이면서 북한은 임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더욱 심도 있게 보도하게 된다. 임수경은 8월 2일까지 단식 농성을 벌였고, 이러한 퍼포먼스로 북한에서 ‘통일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 남한의 천주교 신부 4명은 안기부에 의해 구속됐으며, 28일 DJ에게도 구인장이 발부됐다. DJ에게는 문익환 목사 및 서경원 의원, 임수경의 밀입북에 메시지 또는 자금 지원 등이 있었는지 혐의가 덧씌워졌다. 

 

1989.08.15. 임수경 귀환…“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8월 16일 한겨레 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8월 16일 한겨레 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8월 15일, 임수경은 한국전쟁으로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최초로 공개적으로 휴전선을 걸어 남쪽으로 넘어왔다. 북한과 유엔사령부의 만류에도 불구, 제3국을 통하지 않은 채로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통하여 귀국한 것이다. 그는 휴전선을 넘어오자마자 안기부가 보낸 헬기를 타고 구속됐다. 그가 안기부 직원들에게 잡혀 헬기로 끌려가는 ‘마지막 모습’은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임수경씨 판문점 귀환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씨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임씨와의 동행을 위해 파견한 문규현 신부가 15일 오후 2시22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이들의 귀환은 임씨의 경우 방북 46일 만에, 문 신부는 20일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임씨와 문 신부가 귀환한 뒤 관계 당국은 유엔군사령부 경비병으로부터 이들을 인계받아 헬기 2대로 서울로 연행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신문〉, 1989.08.16 1면 기사

당시 언론의 평가는 조금씩 다르다. 〈경향신문〉은 1면 ‘申聞鼓(신문고)’ 가십란을 통해 “북의 정치놀음에 놀아난 꼭두각시 역”, 〈동아일보〉는 “휴전 체제를 위협한 행위”라고 비판한 반면, 〈한겨레신문〉은 “통일운동의 소중한 밑거름”이라는 평을 남겼다. 

임수경은 국가보안법상의 탈출과 잠입, 회합, 고무 찬양, 금품 수수 등 13가지 죄목으로 다음해 6월 11일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총 3년 5개월의 옥살이 끝에 1992년 12월 24일 가석방됐다. 그의 ‘1심 변호인단’에는 현 대통령인 문재인 당시 변호사를 비롯해 한승헌·홍성우·조영래·김형태·박원순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 변호사 70명이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9년 8월 15일 2시 22분, 판문점 군사분계선 위에서 '평화의 기도'를 바치는 더불어민주당 임수경 전 의원(왼쪽), 문규현 신부 ⓒ 임수경 제공
1989년 8월 15일 2시 22분, 판문점 군사분계선 위에서 '평화의 기도'를 바치는 더불어민주당 임수경 전 의원(왼쪽), 문규현 신부 ⓒ 임수경 제공

마지막으로 임수경은 지난 2016년 본지와 만나 군사 분계선 위에 올랐을 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1989년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을 때, 나는 군사분계선 위에 올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남긴 평화의 기도를 외쳤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지금의 나는 앞으로 어떤 사명을 갖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다시 고민하고 있다. 다만, ‘평화의 도구’로 쓰이고 싶다는 소신은 여전하다. 

통일은 이벤트가 아니라, 민족의 염원을 향한 고단한 순례다. 우리 국민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다. 내 고민의 종착지가 어디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곳이 어디든 간에 ‘통일의 꽃’을 꿈꾸고 있으리라.”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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