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임기 4년차 어김없이 찾아온 ‘화무십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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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임기 4년차 어김없이 찾아온 ‘화무십일홍'
  • 송오미 기자
  • 승인 2016.08.24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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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계파 행보로 본 朴 탈당 가능성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송오미 기자)

‘권불십년·화무십일홍(權不十年·花無十日紅)’. 이 단어들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임기 4년차를 맞고 있는 박근혜 정부도 ‘레임덕’을 피할 수 없는 듯하다. 여권 내부에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행위가 레임덕의 시발점(始發點)이다. ‘우병우 사태’를 두고 친박계 내에서도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모습이 나타났다. ‘우병우 감싸기’를 하고 있는 청와대와 달리, 강성 친박 몇몇을 제외한 범친박계 의원들마저 ‘우병우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원내대표직에 오른 정진석 의원도 예외가 아니다.

▲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 뉴시스

한국정치의 판도는 계파가 결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파정치는 수장이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과 그를 둘러싼 인맥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수장과 계파의 인맥이 계파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실익’을 주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거나 정치위기에 따라 감소할 경우, 계파 간 이합집산이 시작된다. 이합집산은 계파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다. 심하면 수장이 그 당을 ‘탈당’해야 되는 경우에까지 이른다.

대개의 경우 대통령에 당선되는 인물은 한 계파의 수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년 단임제 대통령제 하에서는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계파의 이합집산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역대 정부를 봐도 시기는 다르지만 임기 중반 이후에는 계파 분열이 시작됐고 임기 후반기로 갈수록 내부비리가 집중적으로 터지면서 정권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 YS

문민정부는 3당 합당과정을 거쳐 출범했다. 민정계와 민주계, 공화계라는 서로 판이한 세력들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민주계 중심의 국정운영을 펼치며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하나회 척결, 금용실명제, 파격적인 인사로 집권초기 지지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김 대통령도 임기 후반에 이르자 노동법 날치기, 한보 비리, 아들 김현철씨의 구속사태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후보와의 갈등도 이어졌다. 이 후보는 대선 1년을 앞두고 1997년 10월에 기자회견을 열어 김 대통령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에 대한 검찰수사 유보를 강하게 비판하며 김 대통령의 탈당을 공개적으로 요구한다. 한 달 뒤 김 대통령은 탈당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 2009년 시사오늘과 인터뷰 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시사오늘

◇ DJ

김대중 정부는 김종필 세력과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는 내부계파 갈등을 초기부터 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역기반과 이념, 국정철학 등 모든 것이 상이한 두 개의 정치세력이 집권을 위해 일시적으로 뭉쳤으니, 내부 갈등은 불을 보듯 뻔했다. 'DJP 연합‘은 머지않아 계파갈등을 야기 시켰다. 2000년 초에 김종필 총리는 연합정부 파기를 선언했고, 김대중 정부는 내부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또 다른 여권 내부의 분열요인은 신주류와 구주류의 갈등이었다. 김중권 초대 비서실장을 따르는 소장파 정치인들과 권노갑 고문을 따르는 노장파 정치인들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본격적인 내부 계파 분열은 권노갑 고문이 2000년 당시 소장파 리더였던 정동영 전 의원에게 ‘퇴진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결국 권 고문은 “당과 대통령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저의 숙명”이라는 말을 남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을 중심으로 한 당 쇄신운동이 계속됐고, 이후 노무현 정권 탄생과 맞물려 분당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집권 5년차인 2002년 5월에 세 아들의 비리의혹과 진승현·이용호 게이트가 연달아 터지면서 레임덕 현상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2002년 대선이 다가오자 당 안팎에서는 김대중 정부와의 차별화 논란이 거세가 불어 닥쳤다.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5월, 탈당을 선언함으로써 전임자인 김영삼 대통령의 전철을 밟게 됐다.

▲ 청와대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 뉴시스

◇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1년 후인 2004년 3월에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 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사태를 겪는다. 다행히도 같은 해 5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은 기각됐고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한다.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도 한다. 곧이어 실시된 4·15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이 불어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차지하면서 원내 제1당이 된다. 일명 ‘탄돌이’ 탄생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2006년에 실시된 5‧31지방선거에 패배하게 된다. 그러자 당 내에서는 대통령과 거리를 둬야한다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지방선거 이후 7·26 재·보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전패하자 소위 ‘탄돌이’ 초선의원 39명은 성명을 내고 선거 패배의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탄돌이’의 배신이었다.

같은 해 11월, 대선 일 년여를 앞두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한길 의원은 “이제야말로 당정 분리가 필요한 시점”이며 “대통령은 안보와 외교‧경제 문제에 집중해 달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위함이었다. 임기 말 레임덕이 정점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여당 내부에서 탈당 목소리가 높아지자 노 대통령은 집권 5년차인 2007년 2월에 결국 탈당을 하게 된다.

▲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 뉴시스

◇ 이명박

총선과 대선을 한해 남짓 남겨둔 2011년 7월 4일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친이계의 확실한 퇴조와 친박계의 약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친이계가 조직적으로 지지한 원희룡은 전당대회 후보별 득표에서 4위에 그치고 만다. 반면,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홍준표와 유승민은 각각 1, 2위를 기록했다. 당내 무게중심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이에 앞서 열린 5월 6일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친박계의 지원을 받은 비주류 황우여가 친이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안경률 후보를 눌렀다. 전당대회에서 친이계가 패배하자 당내 친이계 최대 모임인 ‘함께 내일로’가 해체 논란에 휩싸이며, 구성원 다수가 이탈하기도 했다. 당시 당 안팎으로 이명박 대통령 탈당론이 대세를 이뤘지만, 이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을 바꾸고 측근들을 물갈이 하면서 탈당 논란을 일단락 시켰다. 당은 이미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로 전환한 상태였다.

▲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 ⓒ 뉴시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김수진 교수는 박근혜 정부도 탈당에 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24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내년쯤에 비박을 위주로 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탈당의 압력이 형성 될 것”이라며 “심하면 당이 쪼개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재한 국제경영전략연구소장도 같은 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어떤 정부든 임기 말에 가면 지지율이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여론을 의식하고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역대 대통령들은 탈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탈당을 하지 않고 버틴다면, 이는 민심을 이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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