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람 돌풍’,실체는?…‘40대 기수론’ YS 만나보니 [김자영의 정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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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람 돌풍’,실체는?…‘40대 기수론’ YS 만나보니 [김자영의 정치여행]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3.02.24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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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전대, 친이준석계 등장으로 새바람
천하람, 2019년 정치 입문…검증 기간 짧아
YS, 26세 초선…15년간 경력 쌓아 ‘40대 기수론’ 
원내총무 5번…원로 갈등부터 당 위기 수습까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그래픽 = 김유종 기자)
<시사오늘>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바람을 일으킨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기까지 정치 여정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 시사오늘 (그래픽 = 김유종 기자)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대표 출마를 선언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천하람 후보의 돌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론조사 상에서 1, 2위를 다투던 김기현·안철수 후보의 뒤를 빠르게 쫓으며 전당대회의 새로운 변수가 됐는데요. 

친윤계와 대통령실이 전당대회 과정에서 유승민·나경원 전 의원과 안철수 의원을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가 보였을 때 일각에서 ‘개입이 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때 나타난 이들이 친이준석계로 꾸려진 이른바 천아용인(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입니다. 

이들은 ‘윤핵관 퇴진’을 주장하며 ‘비윤계’ 표심을 결집하고 나섰습니다. 네 사람 모두 컷오프를 통과하며 예비경선에서 친윤계로 알려진 이용·박성중 의원 등을 제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천 후보가 책임당원 내 여론조사에서 2위 지지율을 보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폴리뉴스>와 <경남연합일보> 의뢰로 피플네트워크리서치(PNR)이 지난 21~22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3025명 중 국민의힘을 지지하며 자신이 책임당원이라고 응답한 505명을 대상으로 김기현 후보가 42.7%로 1위, 천 후보가 22.8%로 2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안철수·황교안 후보는 각각 17.9%, 14.2%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1986년생인 천하람 후보는 당대표 후보자 중 유일한 30대인 만큼 정치 경력이 짧습니다. 그는 2019년 창당한 젊은보수의 대표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2020년 미래통합당에 합류하며 국민의힘 순천갑 당협위원장, 국민의힘 혁신위원까지 맡게 됐는데요. 실질적으로 천아용인의 단장을 자처하고 있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아니었다면, 이만큼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 거란 분석이 있습니다.  

국민의힘이 지난해 이 전 대표를 징계하는 과정에서 큰 위기를 겪은 만큼, 당대표가 정부와 기존 세력, 기존 지지층과 융화하는 정치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당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 제시도 필수적입니다. <시사오늘>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바람을 일으킨 대표적 세대교체 사례인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기까지 정치 여정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YS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1969년, 41세 나이에 ‘40대 기수에게 리더십을 넘겨줘야 한다’고 주창한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오며 대권 도전의 꿈을 밝혔습니다. 그때까지 야당의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를 5번 하는 등 정치력을 차근차근 쌓아왔는데요. 

1961년 2월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의 갈등 끝에 YS는 유진산, 이민우 등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민당을 창당하는데요. 그는 33세 나이로 원내 부총무를 맡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보여줬습니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를 저지하기 위해 야권은 통합을 도모합니다. 1965년 민정당을 중심으로 자민당, 국민의당이 합해 만든 민중당에서 YS는 원내총무를 맡았습니다. 이때가 37세였습니다.

당시 원내총무로서 당내 갈등 수습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로 경제 성장을 이룰 때 야권의 대표 지도자였던 윤보선과 유진산은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갈등 끝에 당을 깨고 나가 신한당을 만들고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민중당 내에 대선후보가 없어 위기를 겪었을 때 김영삼이 유진오 박사를 영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유진오와 윤보선 두 사람이 야권 후보로 나서서 박정희와 싸운다면 패할 것이 자명했습니다. YS는 다시 민중당과 신한당의 통합을 추진합니다. 이로써 신민당이 만들어졌고, 대통령 후보는 유진산, 당권은 유진오가 맡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또한 실패하긴 했지만,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김종필과 연합작전을 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원내총무로서 탁월한 정치력을 선보였습니다. 동료 의원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리더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쌓아온 정치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1969년 11월, 원내 총무직을 내려놓고 ‘40대 기수론’과 함께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합니다. <김영삼 재평가>의 저자인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당시를 “원로 중심의 서열을 중시하는 보수 야당에서 그것은 일종의 폭탄선언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이철승의 동참으로 야당은 활력을 얻었습니다.

천하람 후보는 대구 출신이지만 국민의힘 열세 지역으로 알려진 전남 순천으로 온 가족이 이사해 출마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한 바 있습니다. 각종 TV 프로그램 패널로도 활동했습니다. 아직 그의 정치력에 의문점을 가진 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선 향후의 행보가 더욱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YS가 37세의 나이에 정치 원로인 윤보선과 유진오의 단일화에 기여하고, 통합형 야당 신당인 신민당 출범에 결정적 역할을 해낸 것처럼 ‘대화와 타협, 설득’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실현해갈 청년 정치인들의 등장을 기대해봅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뒷담화’는 현 정치 상황을 75년 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봤습니다. <시사오늘>은 ‘청년 정치인과 YS’를 살펴봤습니다. <편집자주>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됩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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