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대표의 단식이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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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대표의 단식이 실패한 이유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6.10.04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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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지난 2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단식을 중단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이다.

당초 이정현 대표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야당이 김재수 농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정 의장이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이 대표의 단식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정 의장이 사퇴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느 누구도 정 의장의 사퇴를 예상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대표의 단식은 실패로 끝난 것이고, 매몰차게 얘기하면 쓸데없이 고생만 한 셈이다.

이 대표의 단식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무엇일까.

간첩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민주화운동 인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감옥살이와 수배생활을 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는 자신의 단식 경험에 비춰, ‘단식의 두 가지 조건’을 얘기한 적이 있다.

▲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은 처음부터 성공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뉴시스

첫째는 단식을 통해 요구하는 사항이 이뤄질 가능성이 상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단식을 시작하면 분위기가 단식을 하는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결국은 단식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판단이 끝났으면 ‘내가 단식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이정현 대표의 단식은 첫째 조건부터 불충분했다. 애당초 야당이 김재수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것을 놓고 찬반이 팽팽할 뿐 어느 한 쪽이 잘했다는 여론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정세균 의장의 중립성 위반 여부도 논란만 있었지 결론이 날 기미는 안 보였다.

이처럼 단식 요구사항이 실현될 가능성이 낮았기에 두 번째 조건인 죽음을 각오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뭔가 기대감이 있어야 단식의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죽음을 담대히 맞겠다는 결기가 유지될 수 있는 데 처음부터 부족했던 것이다.

정치인의 단식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故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단식이다.

YS는 지난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민주회복' 등을 요구하며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YS의 단식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전두환 정권이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단식중인 YS를 찾아가 출국을 권유하며 회유했을 정도다. 하지만 YS는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있다”며 “시체로 만들어 부치면 된다”고 제압했다.

YS의 단식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된 것은 물론 민주화 세력이 다시 결집했고 1984년 5월 18일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됐다. YS는 곧이어 故김대중 전 대통령(DJ)와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 1985년 2·12총선(12대)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YS의 단식은 장기표 대표가 언급한 ‘단식의 두 가지 조건’을 완전히 충족한 단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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