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의혹] 한 정치거물의 추락을 불러온 사건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의혹] 한 정치거물의 추락을 불러온 사건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9.06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통령이 본 정치史>1997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이회창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한설희 기자)

사진은 2017년 3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당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다.ⓒ뉴시스
사진은 2017년 3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당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다.ⓒ뉴시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쉽게 용서할 수 없는 두 가지 비리(非理)가 있다. 첫째는 입시(+취준)이요, 둘째는 병역이다. 이 둘은 한국인이라면 거쳐야 할 관문 중 하나로, ‘공정성’과 맞닿아 있다.

역대 대한민국에서 두 가지 비리 의혹 중 하나라도 휩싸였던 정치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본인보다 자녀를 둘러싼 의혹이 대부분이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여덟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쉽게 용서할 수 없는 비리의 시초(始初)격인,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논란이 된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이다.

대통령 회고사의 의미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고사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당사자인 이회창 회고록도 참고했다.
 


1997.3~7月. 대선 전초전(前哨戰)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 여야(與野)는 당내 대선 후보를 결정하느라 분주했다. 그중 가장 먼저 제15대 대통령 후보를 확정한 정당은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였다. 

5월 19일, 국민회의는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제2차 전국대의원 대회를 열었다. 당시 김대중은 77.5%의 득표율로 대통령 후보이자 동시에, 73.5%의 득표율로 제2대 당 총재에 선출됐다. 이로써 김대중은 여야 중 가장 먼저 대선 주자로 결정됐다.

두 번째는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이었다. 6월 24일, 자민련은 국민회의와 같은 장소에서 제1차 정기 전당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종필은 82.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으며, 같은 날 대의원 만장일치로 그는 또 한 번 총재로 선출됐다. 이로써 김종필은 1987년에 이어 10년 만에 대선에 출마하게 됐다.

1997년 10월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있다.ⓒ국회보 199711
1997년 10월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국회보 199711

문제는 신한국당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후보가 결정된 야당과는 달리,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는 이른바 9룡이라 불리는 9명의 대통령 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국당의 9룡상쟁(九龍相爭)에는 이회창·이홍구·이수성·최형우·김덕룡·이인제·김윤환·이한동·박찬종이 있었으며, 영입파와 당내파, 민주계와 민정계, 여러 지역기반 등이 뒤섞여 있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1997년이 시작될 때부터 최대 관심사이자 제15대 대선의 최대 변수였던 신한국당 후보는 7월에야 결정됐다. 7월 2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당대회 2차 결선투표에서, 이회창이 2300표 차로 이인제를 꺾고 대선 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이회창은 당시 신한국당 경선의 의미를 ‘최초의 직접·자유선거에 따른 경선’으로 평가했다.

1997년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여당에서 최초로 대통령 후보를 대통령의 의중이 아니라 당원(대의원)이 직접, 자유선거로 선출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략) 이번 신한국당 경선은 여러 가지 경선의 부작용에도 그 후 각 정당의 대선 후보 선출의 관행을 바꾸는 효시가 되었다. 물론 야당의 경우 국민회의 김대중 씨나 자민련의 김종필 씨는 실질적인 경선 없이 자신들이 대선 후보로 나서는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였지만 그 후로는 여야 할 것 없이 자유경선이 대선 후보 선출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이회창 회고록2, 289~191쪽.

그렇다면 당시 야당의 대선 후보들은 신한국당의 경선을 어떻게 봤을까. 이를 위해 김대중과 김종필의 자서전을 살펴봤다. 

신한국당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돌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회창 대세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대항마로 떠올랐다. 7월 21일 전당 대회가 열렸고, 이회창 총재가 60퍼센트의 지지로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경선 이후에도 이회창 후보와 민주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이 후보와 김 대통령의 대리전을 연상케 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62쪽.

(1997년 대선에서) YS는 자신이 출마할 수 없지만 평생 경쟁자인 DJ의 집권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계 구도를 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DJ는 오매불망 대통령을 향한 도정에 나를 끌어들여 반드시 당선되겠다는 집념으로 넘쳐났다. (중략) 이런 열기와 대립 속에서 3김과 관계없는 제3의 후보는 사실상 등장하기 어렵다. 이회창, 이인제 후보는 나중에 변색되긴 했으나 처음부터 YS가 직접 키우고 길렀던 후계자들이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220~221쪽.

한편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신한국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누구를 염두하고 있었을까. 김영삼 회고록에는 경선이 있기 전 신한국당 대표에 이회창을 지명할 만큼 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사실 신한국당에서 누구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든 12월 실시될 차기 대선(1997년)에서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신한국당 후보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모두가 주시하고 있었다. (중략) 이회창 씨는 내가 그를 감사원장, 국무총리로 발탁했고, 1996년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전국구 1번을 주어 정치인으로 키워내는 등 나와는 나름대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회창씨를 지명하는 것이 가장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대표직을 맡긴다면 무난하게 당을 끌고 나갈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3월 1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나는 당 대표에 이회창 씨를 지명했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05~306쪽.

1997.7~8月.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 쟁점화(爭點化)

2002년 8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KAFF) 주관 제8 회 전국농업경영인대회(충남 안면도)에서 악수하는 모습이다.ⓒ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
사진은 2002년 8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KAFF) 주관 제8 회 전국농업경영인대회(충남 안면도)에서 악수하는 모습이다.ⓒ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

9마리의 용들 가운데 60%의 득표율로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당선되면서, 변수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때 이회창의 두 아들에 대한 병역 비리 의혹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다.

사실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은 신한국당 내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각 후보 간 치열한 비판 과정에서 등장했던 의혹 중 하나였다. 경선 과정에서 △이수성 후보 부친의 친일행적 및 외숙부의 사상 시비 △이인제 후보의 효산 개발 인허가 연루설 △모 후보에게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의 자금 지원설 등이 불거졌다.

하지만 정작 대선의 새 변수가 된 시기는 당내 경선 직후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측에서 집중적으로 이회창 아들의 병역 비리를 거론하면서 쟁점화 됐다. 의혹은 이회창 장남이 179cm에 45kg, 차남이 165cm에 41kg으로 둘 다 체중미달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중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은 “두 아들이 최초 신체검사에서는 갑종 판정을 받았으나 병역 연기신청 후 수년이 지나 10, 20kg씩 체중을 감량해 면제받았다”고 지적했다. 즉, 장남은 최초 신검에 비해 20여kg 이상 감량해 45kg이 됐으며, 차남도 10여kg 이상 감량해 41kg으로 면제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회창은 “장남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논문 준비 등을 하다 매우 야위었고, 차남은 신경성 위염으로 고생했다”며 몸무게 자연감소에 의한 병역면제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8월 1일 한겨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6.5%는 이회창의 두 아들의 병역 문제를 고의 또는 불법적인 병역기피 행위라고 봤다. 반면 합법적인 병역 면제로 보는 응답자는 14.3%에 그쳤다.

이처럼 이회창은 병역 비리 의혹으로 대선 승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전당대회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50% 가까운 지지율을 얻었던 그는, 불과 며칠 만에 병풍(兵風)으로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회고록과 김종필 증언록에는 이회창의 높은 지지율에서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을 계기로 급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있다.

이회창씨의 대선 승리는 거의 확정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돌출했다. 야당인 국민회의는 이회창 씨가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직후, 이회창 씨의 두 아들의 병역 문제를 쟁점으로 들고 나왔다. 이회창씨의 개혁성과 도덕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회창씨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전당대회가 끝난 지 한 달여 만인 8월 중순을 넘어서자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10% 후반에서 20% 초반을 넘나들 정도로 급강하했다. 김대중씨는 30%에 육박하는 고정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1997년 대선 구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가뜩이나 당내 경선 탈락 정치인들과의 관계가 더욱 벌어졌던 이회창 씨가 두 아들의 병역 문제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자, 당내에서는 이회창씨의 낙마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경선에서 2위를 한 이인제 경기지사의 거취에 점차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25~327쪽.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양당 합동 의원총회,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공동 유세 등으로 공조의 틀을 견고히 짜갔다. 7·21 전당대회 직후 50% 지지율을 보였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8월 들어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으로 지지가 급락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의 1위 흐름이 고착됐는데 전통적인 여권과 보수 세력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중략) 자민련 안에서도 김대중의 색깔을 의심하는 의원들이 이회창을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YS의 은밀한 제안(DJ와 손을 떼고 YS와 내각제를 추진해 보자)은 진정성은 있다고 봤지만 현실성은 떨어졌다. 김대중과 나는 없었던 일로 하기엔 너무 먼 길을 함께 걸었고 여권에서 김영삼이 이회창 세력의 반발을 무리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기엔 대통령으로서 힘이 너무 빠져 있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224~225쪽.

반면 김대중 자서전에는 이회창의 병역 비리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도리어 이후 10월 7일에 터졌던 본인의 비자금 사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며, 그 사건을 이회창이 국면을 전환하고자 개입했던 공작이라는 주장을 담았다.

나는 여론 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지켰다. 10월 6일 〈경향신문〉이 창간 특집으로 조사한 여론 조사 결과는 김대중 35.8퍼센트, 이인제 24.2퍼센트, 이회창 20.3퍼센트, 조순 7.2퍼센트, 김종필 4.4퍼센트였다. (중략)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후보보다 뒤졌다. 

그 다음 날인 10월 7일, 여권에서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터뜨렸다. 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이회창 씨의 지지율이 반등할 기미가 없자 국면 전환을 노린 승부수를 준비한 것이었다. 강삼재 사무총장이 총대를 멨지만 사실은 이회창 후보가 개입한 여권의 공작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62~665쪽.

한편 이회창 본인은 병역 비리 의혹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하면서도, 당시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 문제를 기억하고 싶지 않고 언급하는 것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중략) 이 병풍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석었던가 하는 것이다. 나나 당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대비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두 아들이 모두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혹을 살 만하고 상대방인 새정치국민회의 측에서 볼 때는 이런 호재가 따로 없었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병역면제 과정에 아무런 위법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이를 문제화해봤자 잠시 시끄럽겠지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 이회창 회고록2, 296~297쪽.

그는 또한 병역면제에 대한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적시했다.

병역면제의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이렇다. 큰아들 이정연은 미국 유학 중 1990년 12월 유학생 병역연기 기간 만료로 귀국해 1991년 2월 춘천에 있는 부대에 입대했는데 그때 신체검사에서 키 179센티미터, 체중 41킬로그램으로 5급 판정을 받았다. 큰아들을 포함한 20여 명이 춘천에 있는 군병원에서 4일 간 고의감량 여부를 가리기 위한 정밀관찰과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고의감량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5급 판정이 확정되어 병역면제가 되었다.

또 작은아들 이수연은 대학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1차 실패한 후 먼저 군복무를 마치기로 하고 1989년 입소했다. 당시 키 164센티미터에 체중 41킬로그램이 나와 5급 판정이 되었다가 특수층 자녀관리 대상이라 해서 4급으로 상향조정되었다. 1990년에 방위병으로 입소했고 이때 신체검사에서 체중이 역시 41킬로그램으로 나오자 며칠 동안의 정밀관찰과 검사를 받은 후 5급 판정이 확정되어 병역면제가 되었다.

- 이회창 회고록2, 299~300쪽.

1997.9月. 이인제 신한국당 탈당 및 국민신당 후보 출마

이때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신한국당에서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다. 당시 병역 비리 의혹이 터진 후 이인제는 직·간접적으로 후보 교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여당 내부에서 이인제-이회창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으며, 분열 가능성도 제기됐다.

잡음 속에 이인제는 9월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한국당 탈당과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애초 이인제가 예고했던 12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독자 출마를 자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이인제와 함께 신한국당을 탈당했던 의원들이 모여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새로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인제를 선출한다. 이로써 1997년 대선의 새 판이 짜졌다.

당시 이인제의 경선 불복에서 비롯된 독자출마 선언은 여야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아래는 기자회견 다음 날 여야 대변인이 냈던 성명 및 논평을 요약 글이다.

신한국당 : 이 씨는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당원을 배신했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지자제를 위기에 빠트렸으며, 국민에게는 정치 불신을 심화시킨 역사적 죄를 범했다.
국민회의 : 이 지사가 출마를 앞두고 일관성 없이 처신한 것은 대선 후보로서 자질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 것
자민련 :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유린하는 처사. 하지만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시점에서 고심 끝에 독자 출마를 결심한 것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한편 회고록을 통해 김영삼은 대선 후보 교체 주장에 대해 ‘민주적 경선 결과’의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이인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회고록에 기술했다.

이회창 후보 교체론이 등장하고 있는 한편에서, 더욱 좋지 않은 일이 꼬리를 물었다. 이인제 지사가 여론조사의 인기를 업고 독자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하지만 당의 민주적 경선 결과를 무시하고 탈당해 출마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8월 27일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서 점심을 하면서 대선 독자 출마를 강력히 만류했다. 이날 회동에서 나는 “12월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당력이 집중돼야 하며, 이 지사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 노력해 주기 바란다”며 독자 출마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략) “이 지사가 이회창 씨의 선거본부장을 맡아 그를 도우라. 긴 장래를 보아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지사에게도 좋다”고 말했다. 나의 말을 신중하게 듣던 이인제 지사는 “앞으로 당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정도를 걷겠습니다”하고 약속했다. (중략) 이인제 지사는 내가 공천을 주어 정계에 입문시켰고, 문민정부 취임 후 노동부장관에 기용했으며, 1995년 부활된 지방선거에서 경기 지사 후보로 공천해 당선된 인물이었다. 나는 내가 직접 간곡히 설득한 만큼 반드시 내 말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28~329쪽

또한 김영삼은 신한국당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갈등 봉합을 위한 노력과 이인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이인제의 탈당 기자회견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후보교체론’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본격적인 수습 행보에 나섰다. 나는 정재문, 박찬종, 김종호, 서석재, 김운환 등 당내 비주류 혹은 중도적 입장을 가진 인사들을 잇따라 만나 ‘이회창 흔들기’를 자제토록 당부했고, 강삼재 총장을 통해 당의 중진들에게 이회창 대표를 도와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중략) 9월 8일 저녁 나는 신한국당 주요 당직자 76명을 청와대로 초청, 만찬을 함께 했다. 나는 “모든 힘을 경주해서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자”면서 9월 중 이회창 대표에게 신한국당의 총재직을 넘겨줄 것이라는 나의 결심을 밝혔다. (중략) 이날 만찬을 끝내고 청와대 본관의 만찬장을 나오는 순간이었다. 이회창 대표가 나를 급히 따라나오면서 연방 고개를 숙이며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하고 되풀이하던 그의 말을 지금도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중략) 9월 13일 아침, 조깅 후 샤워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서석원 비서가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인제 지사가 오늘 탈당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모든 방송과 신문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중략) 이인제 씨는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회창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반드시 출마해야 한다’며 막무가내인 상황이라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하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화가 치밀어 그가 미처 얘기를 끝내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34~338쪽. 

하지만 이회창은 이러한 회고록에 명시된 김영삼의 주장을 뒤집는다. 그는 이인제를 만나고자 노력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인제의 탈당에 대한 착잡한 심정도 드러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인제 지사의 탈당을 막으려고 노력한 경위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나에게 이 지사를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라고 수차례 권고했는데도 하순봉 비서실장을 대신 보냈을 뿐 찾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중략)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찾아가 만나고자 무척 노력했다.

(중략)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협력을 구하고 함께 3김 시대 후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자고 말했다. (중략) 하지만 그는 나의 제의에는 즉답을 하지 않고 당 개혁안만 얘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기로 이미 결심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이회창 회고록2, 304~306쪽.

1997.12月. 제15대 대선

이인제 탈당에 대한 김영삼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그 이후로도 국민회의 김대중과 자민련 김종필이 연대했던 DJP 연합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등장했지만, 이회창 아들의 병역 비리가 발단이 된 이인제의 탈당이라는 파도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결국 1997년 대선은 1.6%포인트 격차로 김대중이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선 직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의원 170명은 대선의 승패를 가른 큰 요인으로 약 40%가 이인제 후보의 탈당으로 인한 여권과 영남표의 분열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12월 23일자 동아일보는 “여권 표가 분산하면서 김대중 후보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삼도 설문조사와 마찬가지로 이회창의 패인으로 이인제 후보의 탈당으로 지지기반이 흔들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이회창 측의 본인을 향한 비방 광고도 짚었다.

이회창 후보의 제일 큰 패인은 여당의 지지기반이던 부산, 경남에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표가 30% 가까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회창 후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비난하는 주장을 계속해댔다. 12월 8일 중앙지 및 지방지 등 도하 일간지 1면에는 이회창 후보가 나를 비난하는 대형 광고가 실렸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만든 사람을 비방하고 험구를 늘어놓는 것이 득표에 도움된다 생각했다면 우리 국민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회창 진영에서 세운 선거 전략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최종 순간만이라도 나에 대한 비방을 멈췄다면 그는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71~372쪽.

1997년 12월 17일 꽃다발을 들어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부총재 모습이다.ⓒ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1997년 12월 17일 꽃다발을 들어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부총재 모습이다.ⓒ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1997년 대선 승리를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노무현은 김대중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지지층을 묶어낸 승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12월 18일, 선거가 끝났다. 내가 당선되었다. 얼추 40만 표차였다. 중앙 선관위는 나를 선택한 유권자가 1032만 6275명이라고 집계했다. 80.7퍼센트의 투표율에 40.3퍼센트의 득표율이었다. 선거 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의 정권 교체를 이룬 것이다. 한국 정당사에, 또 야당에 몸 바쳐 봉직했던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바치는 영예였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73쪽.

1997년 대선 승리는 최상의 조건과 탁월한 리더십이 결합해서 빚어 낸 기적적인 승리였다. IMF 경제위기로 집권 세력이 국민의 신뢰를 크게 상실했다. 이회창 후보의 도덕적 약점이 드러나 지지율이 하락했다. 이인제 후보가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해 보수 세력이 분열됐다. 이런 호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김대중 후보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전통적 지지층을 모두 묶어 낸 위에 DJP연합으로 보수 세력의 일각을 끌어드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도 득표 차는 40만 표가 되지 않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7~198쪽.

그렇다면 이회창은 본인의 대선 패배를 어떻게 봤을까. 그는 언론이 내린 패인 분석에 대해 결과에 맞춘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평가했다.

나는 왜 졌는가? 대선이 끝난 후 언론이나 논평가들은 나의 대선 패배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중략) 언론이나 논평가들이 내놓은 원인 분석은 대체로 ①여권 분열(이인제 탈당, 출마), ②야권 연대(DJP연합), ③병역 문제, ④IMF 외환위기 등을 패배 원인으로 꼽았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결과를 보고 꿰맞추는 전형적인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1.6퍼센트의 차이는 근소한 차이로 언론이 표현한 대로 간발의 차였다. 만일 내가 1.6퍼센트 차이로 이겼다면 어떻게 설명했을까. 아마도 논평가들은 이인제 탈당이나 DJP연합은 당선을 좌우할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대선 결과에 불복한 배신 행위와 표를 얻기 위해 이념과 정의를 팽개친 DJP연합을 끝까지 배격한 나에 대한 정의와 원칙을 지켰다고 평가하지 않았을까. 

(중략) 결국 이인제 후보의 배신 행위와 DJP엽합은 결과적으로 승패를 갈랐지만 그것이 당연히 내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라고 분석하는 것은 겨로가에 맞춘 견강부회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2, 388~391쪽.

거물의 추락에 관하여…자녀 문제

이회창은 정치에 발을 담그기 전까지,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진 강직한 법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독재정권 하에서도 소신 있다고 평가받던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과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임명됐다.

하지만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던 이회창은, 본인의 자질 문제가 아닌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으로 발목이 잡혔다. 단순히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수치로 보이는 급락한 지지율보다 그가 쌓아왔던 강직한 이미지에 도덕적 약점이 생겼다는 것이 이회창의 삶에 더 큰 타격을 가져왔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6일 오전 10시에 국회에서 열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6일 오전 10시에 국회에서 열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97년에서 2019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2년 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는 6일 오전 10시에 시작한 청문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딸의 입학특례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질문공세를 받았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조국과 이회창의 자녀 문제에는 팩트(fact)와 팩트가 아닌 것이 뒤섞여 있다”며 “팩트가 아닌 부분에는 과장되거나 추론·해석돼 여론화한 내용이 포함됐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회창의 병역 비리 의혹과 관련해 “이회창 아들이 군대를 안 간 것은 팩트지만, 왜 안 갔는가에 대한 부분은 팩트에 더해 추론·해석된 것이다. 하지만 ‘왜’에 대한 추론까지 포함한 전체를 팩트로 여론화됐다.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회창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두고, 이회창 측에서는 ‘장남은 박사 학위 위한 논문 준비 과정, 차남은 신경성 위염’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야당 측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10~20kg은 의도적 감량’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강 대표는 같은 날 청문회 운영방식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미국처럼 개인의 사생활 문제는 1차로 비공개하고, 공개 청문회는 정책이나 지위 적합성 여부를 따지는 것이 맞다”며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사람들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를 무릅쓰면서까지 공직에 나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고위층이 자녀를 돌보지 않는 건 일정 부분 문제가 있지만, 팩트는 팩트, 추론은 추론으로 나누어야 하지만, 지금은 사실과 추론이 뒤섞여 여론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