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당 창당] 야권 분열 가져온 창당…그 끝은 대권 실패
[평민당 창당] 야권 분열 가져온 창당…그 끝은 대권 실패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3.06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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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87년 10월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야권 분열로 여당인 민주 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당선.’

2021학년도 한국사 EBS 수능특강 145쪽을 펼쳤다. 2020년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33년 전 그 순간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야권 분열에 따른 노태우 정부 수립으로 머릿속에 담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워왔던 김대중‧김영삼은 왜 대권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잘 짜인 필연이었을까. 과연 그들이 하나가 됐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까.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180여 일 동안 터져 나온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평민당의 탄생에 얽힌 6개월의 시간을 담았다.


1987.6~7月 6‧29선언과 갈등의 서막(序幕)

사진은 여야 영수회담의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거행한 6·26 평화대행진이다. 이는 노태우의 6·29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김영삼자서전
사진은 여야 영수회담의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거행한 6·26 평화대행진이다. 이는 노태우의 6·29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김영삼자서전

“굿 모닝.”

1987년 6월 29일 아침, 중대 발표를 앞둔 그가 기자들에게 건넨 인사는 예상외로 가벼웠다. 자리에 앉은 노태우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문을 활짝 열 특별선언 8개항을 발표했다.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하겠다. (중략)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위해 김대중 씨 등이 사면‧복권될 것이다.”

박종철 몸에 선명히 남은 피멍 자국이, 이한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가,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에 울려 퍼진 넥타이 부대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목소리가 모두 모여 이루어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갈등의 서막을 알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 지명전이 그랬듯, 두 사람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또 한 번 입장 차를 보였다. 그들은 민주화를 앞두고 독재와 함께 맞서왔지만, 대권 앞에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서독 방문 때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할 것’이라는 약속을 내세워 양보를 요구했고, 김영삼은 김대중이 발표한 1986년 11월 ‘직선제가 수용되면 불출마할 것’이라는 선언을 내세웠다.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간의 양보 없는 대결이 시작됐다.

먼저 이에 대한 김대중의 입장을 담은 회고록이다. 그는 김영삼의 주장에 대해 4‧13호헌 조치로 전두환이 직선제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불출마 선언의 효력이 상실했다고 반박했다.

나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김영삼 씨가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천명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겠다.”

김영삼 씨는 그렇게 여러 번 말했다. 나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의중을 물었다. 그런데 김영삼 씨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며 본인이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야권 후보 단일화는 정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씨 측은 내가 작년 11월 ‘불출마 선언’을 했다며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당시의 선언은 이미 전 정권에서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되받았다. 오히려 내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겠다”고 한 김영삼 씨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원천무효가 되어 버린 불출마 선언을 계속 ‘살아 있는 약속’으로 왜곡 보도했다. 나에게 상대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을 비틀어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비열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24~525쪽.

반면 김영삼의 회고록에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는 10쪽에 걸쳐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수록해 후보 단일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았다.

- 김총재와 김의장은 단합과 후보단일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김의장의 불출마선언은 유효하다고 보는가?
“그 얘기는 나에게 묻지 말라. 우리 두 사람이 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것은 불변이다.”

- 김 의장이 지방에 갔다 오면 출마의사를 밝힐 것으로 예상되는데, 김총재의 의중은?
“이 문제가 온 국민의 관심의 초점이다. 김의장과 후보단일화는 자신 있다.”

- 김총재와 김의장 간에 단일후보 조정이 여의치 않으면 표대결로 가는 것 아닌가.
“표대결 않기로 약속했고, 표대결은 절대 없을 것이다.”

- 1971년에도 표대결 않기로 합의해 놓고 표대결하지 않았는가?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85~86쪽.

6‧29선언에 따른 양 김의 분열은 우연이었을까. 이를 계획했던 전두환의 회고록을 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 보인다. 그는 김대중의 사면복권에 따른 양 김의 분열, 그에 따른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대한 큰 그림을 바탕으로 모든 걸 진행했다.

내가 6.29선언을 예비하는 과정에서 직선제 수용과 함께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6.29선언의 내용 가운데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만을 제외했다면 ‘민주화’ 조치를 요구해온 야권과 국민은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 씨를 풀어주지 않은 ‘민주화 조치’를 김영삼 씨는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인가.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이 ‘민주화’를 향한 필연적인 절차였듯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은 필연적으로 야권의 분열, 양 김 씨의 동시 출마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당시 야당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다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김대중 씨를 풀어준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양 김씨의 동시 출마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고, 양 김 씨가 동시 출마하면 노태우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양 김 씨의 동시 출마→노태우 후보의 당선이라는 진행은 나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상황의 산물이었고 나는 그러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양 김 씨 자신들이지 내가 아닌 것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지지 않는다”는 병서의 교훈을 나는 직시하고 있었고, 집권욕에 혈안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3김씨였듯이, 1987년 노태우 후보에게 당선증을 헌납한 사람들 역시 3김 씨였다는 사실은 1980년대 우리의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 전두환 회고록, 652~653쪽.

그의 선택을 두고 김영삼은 ‘고도의 술책’이었다고 후술(後述)했다.

군부 집권세력이 6‧29선언을 발표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시 군부 집권세력으로서는 국민들의 저항으로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선택한 고도의 술책이었다. 그들에게 6‧29선언은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일단 누그러뜨리고 민주화세력의 분열을 획책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려 한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96쪽.

이처럼 6‧29선언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역사적 흐름 속에 있었다.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던 양 김은 국민에게 부푼 희망을 선사했던 이 선언을 분열의 서막으로 탈바꿈했다.

 

1987.8~9月 단일화 시도의 실패

민추협으로 한 때 손을 맞 잡았던 DJ와 YS.ⓒ시사오늘DB
민추협으로 한 때 손을 맞 잡았던 DJ와 YS.ⓒ시사오늘DB

두 사람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의식에 고조됐다. 둘은 군정종식을 확실하게 이뤄내기 위한 후보단일화 시도가 이어졌다. 9월 14일을 시작으로 9월 29일까지 여러 차례 양 김의 회동이 진행됐다.

9월 14일, 후보단일화 시기와 김대중의 지방 나들이(지방순회)를 두고 두 사람이 부딪쳤다. 먼저 시기를 둘러싸고 김영삼은 ‘9월 내 후보단일화 매듭’을, 김대중은 ‘후보는 늦게 결정하는 것이 선거전략상 이로움’을 주장했다. 다음 지방 나들이에 대해 김영삼은 ‘지방순회는 함께 다니는 게 바람직하다’고, 김대중은 ‘여러 번 지방을 다닌 김대중과 달리 15년 간 격리돼있던 나는 사정이 다르다’고 밝혀 입장 차가 있었다.

9월 21일, 김대중은 김영삼이 제안한 후보단일화 시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26일 인천, 27일 고려대 방문 등 단독 지방순회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9월 29일, 양 김의 단일화를 최종 결정하는 회담이 외교구락부에서 열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양보를 요구하기 바빴다.

먼저 김영삼의 회고록이다. 김영삼은 국내에서 해 온 민주화투쟁을 이유로 김대중의 양보를 요구했다.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날 나는 상당한 기대를 갖고 회담에 임했다. 나는 국내에서 줄기차게 민주화투쟁을 해 온 나에게 후보를 양보할 것을 권고했다. 김대중은 끝내 양보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중략)

내가 김대중의 양보에 기대를 가졌던 것은 그 동안 김대중이 나에게 보여 준 언행 때문이었다. 우선 나는 1980년 끝내 신민당을 외면했던 김대중이 8월 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후보단일화 문제로 수 차례 만났을 때도 김대중은 나에게 자신이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했다. 그는 단일화의 시점을 가급적 늦추자고 하면서, “지금 출마하지 않겠다고 얘기하면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실망시킨다. 양측의지지 세력을 끝까지 통합해서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지금 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해왔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03~104쪽. 

반면 김대중은 지방순회에서 확인한 상상을 초월한 국민적 지지와 출마 요구를 이유로 김영삼의 양보를 요구했다. 

우리 동교동 측 양순직, 최영근, 이중재 의원 등이 김영삼 씨와 그 측근들을 만나고 와서 내게 전했다.

“만일 김대중이 후보가 되면 군부가 그날로 죽여 버릴 것이다. 군부가 빨갱이라고 비토하니 DJ는 후보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9월 29일 외교구락부에서 김영삼 씨와 두 시간 동안 만났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담판이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한 국민적 지지와 출마 요구를 확인한 이상 국민 여망을 거절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니 김 총재가 이번에는 양보를 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그러자 김 총재는 다시 비토 그룹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다시 반박했다.

“군정 종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려 싸워 온 사람들이 어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김 총재는 다시 내가 출마하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첨예한 지역 대결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왜 지역감정이 생겨났는지도 김 총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똑같이 지역감정의 피해자들인데 서로가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총재가 나를 도와준다면 이번 선거가 지역감정을 추방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후보 단일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29~530쪽.

이를 바라 본 제3자의 입장은 어땠을까. 노태우는 겉으로는 김대중이 김영삼을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사면‧복권된 김대중이 대권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김영삼 총재가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김대중 상임고문이 이를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미묘하고 복잡했다. 

김대중 고문의 입장에서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사면‧복권된 상태였으므로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모든 영광을 김영삼 총재에게 돌릴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 역시 김대중 고문이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74쪽.

9월 한 달 간 진행된 양 김의 후보 단일화 회담은 두 사람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1987.10~11月 DJ의 평민당 창당

9월 29일 이후 약 한 달 만인 10월 22일, 두 사람은 외교구락부에서 다시 한 번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최후의 방법을 제안한다. 다름 아닌 경선(競選)이었다.

이 날 김대중이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김대중에게 최후의 방법으로 숙고해 온 경선을 제안했다.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이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2쪽.

당시 통일민주당에서 YS와 DJ가 가진 지분을 따져 보면 DJ 측이 열세였다. 전국 92개 지구당 중 창당지구당이 56곳, 미창당지구당이 36곳이었는데, 미창당지구당을 제외하면 30 대 26으로 YS 측이 우세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 후보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미창당지구당 36곳의 조직책을 임명해야 했다. 상도동 측 김동영 의원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하자고 제안했고, DJ로부터 전권을 받고 나선 동교동 측 이용희 의원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23곳을 동교동계에게 달라고 맞섰다.

양측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9월 8일부터 3일 간 광주, 목포, 하의도 등 호남을 순회하며 바람몰이에 나선 DJ는 “36개 미창당지구당을 서둘러 정비해서 경선을 치르자”고 YS를 압박했다. 이에 YS는 후보경선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나 동교동 측 제시안을 전격 수용했다. 이를 두고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김영삼이 결국 후보를 양보했구나”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김영삼은 경선이야말로 공정하게 짧은 시일 내에 후보단일화를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 판단했다.

“측근들과 상의할 시간을 좀 주시지요.”

김대중은 김영삼의 수용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10월 26일까지 생각해보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이틀 뒤 김대중 측근 이중재 부총재가 대신 보낸 메시지는 부정적이었다. 메시지 속에는 후보 출마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탈당하겠다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김영삼은 이를 두고 ‘뒤통수치기’라며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 놓고는 참모를 보내 일방적으로 탈당을 통고하다니! 아무리 출마를 하고 싶어도 민주화의 대의와 국민 앞에 했던 약속을 이처럼 저버릴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분당하는 사태가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나로서는 김대중의 통고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이중재가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방송을 통해 김대중의 탈당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5~116쪽.

그렇다면 김대중의 상황은 어땠을까. 김대중은 22일 김영삼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저 후보 단일화 협의가 난항을 거듭했다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는 지지하는 재야인사들이 수유리 안병무 박사 댁에서 장시간 논의 끝 창당을 결정했다고 짧게 기술했다.

후보 단일화 협의는 여전히 난항을 거듭했다. 이때 나를 지지하는 재야인사들이 수유리 안병무 박사 댁에 모였다. 우리는 장시간 논의 끝에 창당을 결정했다.

10월 30일, 신당 창당과 제13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우리는 신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평화와 민주를 합쳐 만든 당명을 속으로 몇 번이고 불러 봤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30~531쪽.

이러한 김대중의 행보에는 일명 ‘4자 필승론’ 논리가 숨겨져 있다. 당시 동교동계에서는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 4인이 출마했을 때, 노태우‧김영삼이 영남 표를 나눠 갖고, 김종필이 충청, 김대중이 호남과 수도권 지역의 표를 가져가면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전두환은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 실패를 민주당 내부 문제로 보느냐 밖으로 끌어내느냐의 차이로 구분했다. 

당시 당내 세력 면에서 우세했던 김영삼 씨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내부 문제로 묶어두고 양자 간 협상으로 해결하고자 한 반면 김대중 씨는 이 문제를 민주당 밖으로 끌어내 외곽 세력의 지원을 받으려고만 했다.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한 양 김 씨는 각각 자신들의 지역적 연고지를 찾아가 관중을 동원함으로써 서로 세 과시를 하는 가운데 각자 별도의 출마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50쪽.

이후 10월 10일 김영삼의 대선 출마 선언에 이어 김대중도 11월 12일 평화민주당 창당을 시작으로 출마 선언에 이르렀다. 민주화를 함께 꿈꿨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1987.12月 제13대 대선

이번 열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평민당의 탄생에 얽힌 6개월의 시간이다.ⓒ시사오늘 김승종
이번 열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평민당의 탄생에 얽힌 6개월의 시간이다.ⓒ시사오늘 김승종

12월 16일에 실시된 제13대 대선의 승자는 노태우였다. 노태우(36.6%, 828만 표)가 1위를, 김영삼(28.0%, 633만 표), 김대중(27.1%, 611만 표)이 그 뒤를 이었다. 과연 두 사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55.1%의 득표율로 야권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두 사람의 통합에도 승리는 불가능했던 것일까. 만약(IF)이 없는 역사에 수없이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서 있었던 역대 대통령의 심정을 아래에 담았다.

김대중: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많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과 6‧10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 김대중 자서전, 536~537쪽.

김영삼: 1987년 대통령선거를 되돌아볼 때 나는 많은 상념에 잠기곤 한다. (중략) 12월 19일, 도하 신문광고를 통해 사과성명을 냈다. 이 성명에서 나는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한 부덕의 소치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며, 깊이 자성하고 사과드리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 김영삼 회고록, 116쪽&132쪽.

노무현: 극심한 우울감과 패배감에 젖은 채 맞은 1987년 대선은, 결국 좌절감과 환멸의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많은 시민들이 큰 상처를 받았고, 이 상처는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 노무현 자서전, 95쪽.

김종필: 양김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 주요 원인이었다. 그런데 양김씨는 본성상 후보 단일화가 처음부터 어려웠다. 두 사람은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자신의 집권에만 몰두했다. - 김종필 증언록, 137~139쪽.

노태우: 선거는 상대적이다. 상대의 전략을 잘 알고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 야당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분석해 보니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군정종식’이었다. 이 구호는 식자들에게 특히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영삼 씨는 시종일관 이 구호를 외쳐 댔다. 이것이 내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지던 이 구호가 시간이 흐를수록 유권자들에게 식상함을 자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똑같은 구호로 일관하지 않고 단계별로 다양하게 발전시켰더라면 내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 노태우 회고록. 378~379쪽.

전두환: 여당의 승리로 나타난 선거 결과를 놓고 양 김 씨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양 김 씨 가운데 어느 쪽으로라도 단일화가 되기만 했으면 노태우 후보에게 이겼을 것이라 했다. 그 근거로써 양 김 씨의 득표수를 합친 득표율은 55%로서 노태우 득표율 36.6%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정치현실을 도외시한 단순 산술일 뿐이다. 어느 한 김 씨로 단일화가 되었을 때 다른 한 김 씨의 지지표가 과연 단일 후보에게 고스란히 옮겨 갔을 것인가. 야권 후보의 당선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자는 추상적 명분보다는 지역감정에 뿌리를 둔 상대 측에 대한 반감의 강도가 훨씬 더 강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전두환 회고록, 652쪽.


야권 분열 가져온 평민당 창당…그 끝은 대권 실패

뒤늦은 양 김의 후회에도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두 사람이 버리지 못했던 욕심은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직선제 개헌을 바탕으로 민주화 이룩’ 대신 ‘야권 분열로 인한 노태우 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6일 이를 “양보하지 못한 두 사람의 정권에 대한 과한 욕심이 불러온 사건”이라며 “민의에 따라 연대하지 못해 국민에게 아쉬움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강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에 대한 질문에는 “양 김이 민의에 따라 연대했다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이어 그는 제13대 대선을 제21대 총선에 빗대 “보수 측에서 통합론이 나오게 된 것도 87년의 야권 분열 경험에 있다”며 “선거를 앞두고 주변 사람들만 만나다 보면 객관성을 잃고 무조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87년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덧붙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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