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단식] 23일간의 독재 투쟁…“5‧18의 恨은 민족의 멍울이 될 수밖에 없다”
[YS 단식] 23일간의 독재 투쟁…“5‧18의 恨은 민족의 멍울이 될 수밖에 없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5.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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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83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열여덟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농성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여덟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농성이다.ⓒ시사오늘 김유종

그는 분명 재임 마지막 국민들에게 사랑받던 대통령은 아니었다. 탄핵 직전 박근혜 전 대통령(5%) 다음으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한 그였다. 그는 1997년 12월 외환위기를 겪으며 6%의 지지율로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임기말 94%의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았지만, 퇴임 후 보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의 과거 업적이 소환됐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그를 ‘가장 저평가된 대통령’으로 정의 내리기도 했다. 그는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이다.

지난해 11월 미래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가 지소미아 파기철회 및 공수처법‧선거법 반대를 이유로 삭발과 함께 8일 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때 36년 전 그의 단식 농성이 회자됐다. 또 4‧15총선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내정자가 대권 후보로 ‘70년대 생‧40대‧경제 전문가’를 지목하자, 25년 전 그의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 발언과 49년 전 그가 주창한 ‘40대 기수론’이 주목받았다. 40대 기수론은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495)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여덟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2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기를 맞아, 1983년 3주기에 시작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농성을 담았다.

 

1983.05.18.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그리고 단식 1일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라는 상징적인 날, 23일 간의 기나긴 단식 농성의 시작을 알렸다.ⓒ김영삼 자서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라는 상징적인 날, 23일 간의 기나긴 단식 농성의 시작을 알렸다.ⓒ김영삼 자서전

204일간의 서울의 봄이 가고, 역행한 겨울이 광주에 찾아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도 광주에서 시작된 매서운 겨울은 한반도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1983년 5월, 당시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 중이었으며, 김영삼은 한국에 가택 연금(軟禁)돼 있었다.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당한 두 사람에게 3년간 지속된 한반도의 겨울은 어떤 시기였을까. 김대중은 그 시기를 ‘절망 그 자체’로 평가했다.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다.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유린되었고, 인권은 권력에 짓밟혔다. 야당은 있으나 도대체 보이지 않았고, 민주 투사들은 감옥에 있거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60쪽.

당시 김영삼은 1차 연금(1980.05.17.~1981.04.30.) 이후 1982년 6월부터 2차 연금 중이었다. 2년 째 서울 상도동 집 문 밖으로 나갈 수도, 외부인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던 김영삼은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광주항쟁 3주년을 앞두고 나는 뭔가 비장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민에게는 보다 빨리 자유가 와야 했고, 그러려면 독재자에 대해서는 보다 강력한 저항이 필요했다. 그 무렵 나는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를 읽으면서 얼어붙은 상황을 돌파하는 데 중요한 암시를 받았다. 비폭력 무저항의 단식투쟁이었다.

단식에 들어가기 전 나는 오랜 시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생명을 건 저항으로서의 단식투쟁이고 보니, 그야말로 냉엄한 자기 응시의 시간 위에 나를 올려 놓고 추상같이 결의를 저울질한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30~231쪽.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를 읽으면서 중요한 암시를 받았다는 김영삼. 그렇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라는 상징적인 날, 23일 간의 기나긴 단식 농성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이 투쟁은 그 어떤 언론에도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22일이 흘러 단식 중단을 선언하던 날에야 비로소 기사에 실릴 수 있었다.

왜 하필 김영삼은 5월 18일을 단식 시작일로 잡은 걸까.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은 지난 3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YS는 광주 민주화 운동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 해서 단식에 들어간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영삼은 이날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민주투쟁에 대한 나의 결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단식에 들어간다”고 선언한 뒤, “나의 단식은 5‧17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 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대중은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김영삼의 결정에 ‘감동했다’고 술회했다.

5‧18 광주 민주 항쟁 3주기를 맞아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김영삼 씨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당한 채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었다. 단식은 극한 투쟁이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는 감동했고, 동지적 연대감을 느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61~462쪽.

 

1983.05.19.~06.09. 23일간의 단식 일지


김영삼의 23일간의 단식 투쟁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역대 대통령 회고록 가운데 이 사건을 언급한 대통령은 김영삼과 김대중뿐이며, 앞서 언급했듯 국내 언론은 단식 종료일에야 비로소 이 사건을 다뤘다. 따라서 23일간의 역사는 그의 단식 일지와 서울발(發) 외신의 단신이 기록의 전부다.

김영삼은 이러한 상황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인용해 설명했다.

“검열 실시 이후 신문들은 그저 유럽 얘기뿐이란 말이야. (중략) 최선책은 유럽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우리가 유럽으로 가는 것뿐이야. 그래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게 되지.”

[단식 D+2]

19일 오전,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김상현 △조윤형 △박영록 △홍영기 △김명윤 △김상진 △박찬 등 18명이 ‘김영삼 총재 단식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날 이들에 의해 18일에 작성된 ‘단식에 즈음하여’와 16일에 AP통신에 전달된 시국 전반에 대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김영삼을 대신해 낭독됐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못했던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는 5가지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제시됐다. 여기에 △정치범 석방 △정치활동 규제 폐지 △해직 인사 복직 △언론의 자유 보장 △독재헌법 폐지 등이 담겼다.

김무성 의원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5가지 조건과 관련 “이건 내세운 명분이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 진짜 목표였다”고 거듭 강조했다.

위원회는 박영록‧조윤형‧황낙주‧박용만‧김덕룡 등 5명으로 소위원회(위원장 이민우)를 구성, 김상협 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키로 하고, 면담에서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촉구하기로 했다. (중략) 박용만 등은 이 날 오후 3시 20분 총리실로 찾아가 총리 면담을 요구했으나 의전비서관만 만나고 되돌아왔다. 민주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나의 동지들은 내가 발표한 성명서를 등사‧복사하여 집집마다 뿌렸고, 등산객들에게까지 배포하기 시작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54~255쪽.

[단식 D+3~4]

‘정세흐름’은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단어였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정세흐름’은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단어였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단식 3일 차인 1983년 5월 20일. <동아일보> 3면 우측 하단에 짧은 기사가 실렸다. 

최근의 ‘정세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19일부터 신경을 쓰는 눈치.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 등 당 간부들은 이 흐름을 관심 있게 관망하고 있다는 전언이나, 이에 대한 당 차원의 논의까지는 생각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세흐름’은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단어였다. <동아일보>는 그 부분만 유독 「」의 기호로 강조했다. 이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단식 이틀이 지난 5월 20일 모(某) 일간지 정치 가십난에 수수께끼 같은 토막기사가 실렸다. (중략) 최근의 ‘정세흐름’이 과연 무엇인지 일반 국민들은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른 신문들은 그런 ‘말장난’을 할 용기마저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52~253쪽.

다음날 동아일보는 5월 21일자 기사로 ‘민정당은 정세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내보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다음날 동아일보는 5월 21일자 기사로 ‘민정당은 정세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내보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하지만 다음날 <동아일보>는 5월 21일자 기사로 ‘민정당은 정세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내보냈다. 이는 단식 4일차 때의 일이다. 

최근 정가 일각에서 얘기되고 있는 ‘정세흐름’과 관련, 민정당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며 전혀 우려하지도 않고 있다“고 김용태 대변인이 21일 피력. 

김 대변인은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정치에는 퍼펙트 게임이 없는 것이므로 그늘진 구석이 있다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국운이 트여가고 있어 우리가 깔아놓은 궤도를 계속 달려 나가는데 주저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이 같은 궤도에 역행하는 조짐이 있다 해도 국민적인 공감을 받지 못할 것이며 민정당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당의 입장을 전달.

그 어디에도 ‘단식’이나 ‘독재 투쟁’이라는 단어가 담기지 않은 짧은 기사였지만, 김영삼은 당시 정치부 기자들의 노력에 ‘애쓰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양심적인 정치부 기자들은 민정당 대변인의 입을 빌어 온갖 표현 방법을 동원, 어떻게 해서라도 단식사건을 알려보겠다고 애쓰고 있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56쪽.

[단식 D+6]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었던 김영삼 총재 단식대책위원회 전체회의가 무산됐다. 위원들 전원 연금됐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각자의 자택에 불법적으로 감금했다”는 항의 성명만을 발표했다.

[단식 D+7]

김대중이 미국에서 김영삼의 단식 투쟁에 연대 의사를 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 언론에서 ‘정세흐름’이라 불리던 단식 투쟁은 ‘정치현안’, ‘정치관심사’ 등으로 변모했다.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민한당 유치송 총재는 24일 아침 유한열 사무총장에게 ‘국내 정치관심사를 조속히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단식 D+8]

오전 10시 김영삼이 경찰당국이 보낸 구급차로 서울대학병원에 강제 이송됐다.ⓒ뉴시스=독자 정태원씨 제공
오전 10시 김영삼이 경찰당국이 보낸 구급차로 서울대학병원에 강제 이송됐다.ⓒ뉴시스=독자 정태원씨 제공

오전 10시 김영삼이 경찰당국이 보낸 구급차로 서울대학병원에 강제 이송됐다. 이 사건은 국내 언론이 아닌, 외신에 의해 외부에 전해졌다. 

그들은 전화선부터 끊어 놓고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나는 반항했으나 그들의 완력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나의 집은 내가 병원으로 강제 이송된 후 수십 명의 경찰들이 점거했다. (중략)

병원에 이송된 후 나는 강제로 혈액검사를 받았다. 당국에서는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해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 것에 당황했다. 그들은 나의 단식을 중단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나는 일체의 음식과 의료행위를 거부한 채 단식을 계속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58~259쪽.

[단식 D+9]

문익환 목사와 연금 중인 김영삼 총재 단식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D+12]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 병상 앞에 음식상을 갖다 놓기도 했다.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내가 단식을 중단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 썼다. 불고기, 생선 등 맛있는 음식상을 차려 와 내 병상 앞에 갖다 놓고 냄새를 풍기도록 했다. 나는 “그 따위 비열한 짓 하지 말고 당장 가져가라!”고 고함을 쳤다. 그들은 다음 식사 때까지 음식을 그대로 놓아두었지만 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64쪽.

이날 민정당 사무총장이었던 권익현은 김영삼에게 해외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권익현은 “오늘 밤 12시부터 병원과 김 총재 댁에 배치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이라는 전두환의 얘기를 대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완강했다. 그는 연금 해제가 아닌 민주화 조치만이 그의 단식을 멈출 수 있다고 대꾸했다.

전두환의 말은 어디까지나 나에 대한 회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민주화이지 연금해제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하게 대꾸해 주었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다.”

(중략) 나는 연금해제가 단식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가족과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65쪽.

[단식 D+13일]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김영삼의 2차 연금이 해제됐다. 단식 13일 차에야 그의 병실에 지지자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의 물꼬를 텄다.

외부인의 출입이 일체 금지돼 있던 내 병실에 비로소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었다. 내 병실 주변에 모여든 나의 지지자들은 “김 총재가 생명을 걸고 투쟁하는 이 기회에 효과적으로 민주화투쟁을 할 수 있는 대규모 기구를 만들자”는 데 의견이 접근하고 있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싹이 이때 트기 시작한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67쪽.

[단식 D+15]

1983년 6월 1일, 전직 국회의원을 포함한 58명이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범국민 연합전선’을 추진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단식 투쟁은 민주화 세력에게 3년간의 이어진 한반도의 겨울을 깨고, 봄을 알릴 신호탄 역할을 했다.

이른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유신 종말 이후 처음으로 이때 손을 잡았다. (중략) 단식 15일이 넘어서면서, 죽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람도 흐릿하게 보였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68~269쪽.

[단식 D+18]

김대중이 워싱턴과 뉴욕 등에서 재미 교포들과 가두시위를 벌였다. 한국대사관, 국무부, 백악관 앞 등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단식 D+22]

의사들은 김영삼의 건강 상태를 위험 상태로 진단 내렸다. 그날 밤 김영삼은 비서에게 다음 날 아침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단식 D+23]

오전 9시 경, 김영삼은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김영삼 자서전
6월 9일 김영삼은 23일간의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김영삼 자서전

오전 9시 경, 김영삼은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23일 간의 단식은 70kg대의 몸은 14kg이 넘게 빠져 50kg대가 됐다. 김덕룡은 그를 대신해 ‘단식을 마치면서’ 성명을 읽었다.

“나는 오늘 비통한 심정으로 나의 단식투쟁의 중단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중략)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 몸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으로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그 고통과 고난의 맨 앞에 설 것이며, 그 어떤 희생이라고 감수할 것입니다. 

(중략)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그 언젠가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갈 것입니다.”

같은 날 김대중이 쓴 칼럼, ‘김영삼의 단식 투쟁(Kim’s Hunger Strike)’이 <뉴욕타임스> 6일 9일 자 신문에 실렸다.

나는 그의 단식 투쟁을 지원하는 글 ‘김영삼의 단식 투쟁(Kim’s Hunger Strike)’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다. 독자 투고가 아닌 칼럼니스트 자격의 기고였다. 영문 원고라서 제롬 코언 교수에게 보여 주며 손질을 부탁했다. 코언 교수는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김영삼 씨와는 라이벌 관계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를 위해 이런 글 쓰다니 놀랍습니다. 미국인인 내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감동했습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62~464쪽.

그동안 ‘정세흐름’, ‘정치관심사’ 등으로 표현했던 국내 언론은 비로소 단식 종료일에 ‘김영삼 단식 중단’을 보도했다. 각 언론사의 기사에는 23일 동안 담지 못했던 단식에 대한 경과가 짤막하게 담겼다.

그중 가장 먼저 우회적으로 단식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6월 10일자 기사를 통해 23일간의 고충을 기사로 담았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가 정치규제의 전면해금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던 5월 18일부터 김 씨의 단식 중단 사실이 비로소 활자화되기까지의 23일간은 ‘언로의 경색’으로 인해 빚어진 갖가지 풍설을 확인하느라 빗발치는 독자들의 문의와 사실보도의 길이 열리지 못한 사정의 틈바구니에서 언론이 가장 고통을 겪었던 기간. 

(중략) 독자들은 연일 “최근의 정세흐름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궁금증으로부터 이미 구전 등을 통해 김 씨의 단식 사실을 안 듯 한 적지 않은 시민들은 “왜 구체적으로 보도하지 않느냐”고 항의 어린 전화를 걸어왔는가 하면 일부 독자들은 심지어 권력층 내부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엉뚱한 추측까지 해 적확한 보도의 중요성을 반증.

김영삼은 단식을 ‘1980년대의 한국정치사의 전환점’으로 자평했다. 또한 연금 해제만을 위해 단식한 것처럼 보도한 것에는 우려를 표했다.

나의 단식은 1980년대의 한국정치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민추협과 신민당을 조직해 가는 과정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단식 덕분이었다. 단식은 나에게는 용기를, 다른 야권 인사들에게는 각성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단식의 고통과 배고픔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웠다. 죽음과 마주한 순간 내게는 “비열하게 살지 말자. 사람은 깨끗이 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각성이 생겼다. 나는 모든 굴종과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중략) 국내언론은 문공부의 보도지침과 발표문을 충실히 따랐다. 기자들은 문공부의 발표문 외에 직접 취재를 할 수 없었고, 기사의 크기는 2단 이하로 통제되었다. 무엇보다 언론은 나의 ‘민주화 요구’를 기사화하지 않았고, 내가 오직 ‘연금해제’만을 위해 단식한 것처럼 왜곡 보도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9~280쪽.

 

23일간의 단식 투쟁이 ‘통합당’에 던지는 질문


자유한국당은 당사에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뒀다.ⓒ뉴시스
자유한국당은 당사에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뒀다.ⓒ뉴시스

“자유한국당은 김영삼의 후예인가, 전두환의 후예인가.”

지난해 5월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한국당을 향해 던진 이 질문은, 1년이 지난 통합당에게도 유의미한 질문이다. 

1년 전, 이 원내대표의 물음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역사왜곡 처벌 법안 처리에 한국당이 동참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당은 5‧18 진상조사위원회 출범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이라는 김순례 의원과 “5‧18문제만큼은 우파가 결코 물러서면 안 된다”는 김진태 의원에게 징계 유예 결정을 내려 비판을 받았다. 같은 당 이종명 의원의 “논리적으로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란 망언과, 이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는 나경원 전 원내대표의 대처는 당시 한국당의 5‧18에 대한 인식을 대변했다.

1년이 지나 자유한국당에서 미래통합당이 된 보수정당에게 또 한 번 질문이 던져졌다. 다름 아닌, 보수 쇄신의 방향성에 대한 물음이다.

4‧15 총선 참패에 통합당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세대교체를 통한 개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를 거는 보수 청년들의 5‧18에 대한 시각은 2019년 한국당의 시각과는 사뭇 달랐다. 

“저는 5‧18을 민주화 항쟁이라고 못 부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고요. 물론 독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산업화가 달성됐지만, 보수주의자 입에서는 독재나 혁명은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법치주의니까요.” - 전남 순천시 천하람 후보(1986년생), <시사오늘> 2월 인터뷰 中

“저희야말로 산업화‧민주화 세력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들인데, 기존 정치인들의 역사관을 따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박정희는 쿠데타였고, 5‧18은 민주화 항쟁이죠. 정치적 논리에 의 해 자유롭지 못한 기존 정치인들이 어물쩍 넘어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의 공과 과가 분명히 있고, 당연히 김대중‧노무현의 공과도 있죠.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저희 나름대로의 정치를 얘기하려 합니다.” - 서울 도봉구 김재섭 후보(1987년생), <시사오늘> 2월 인터뷰 中

새로운 보수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는 통합당에게 또 한 번의 5월이 찾아왔다. 올해 5월 18일은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기인 동시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농성으로부터 37년, 민추협 결성으로부터 36년이 지난 해다. 2020년, 보수가 꿈꾸는 미래에 5‧18은 어떻게 정의될까.

YS의 한 어록을 끝으로, ‘단 한 줄도 기록되지 못했던’ 23일간의 단식 투쟁이 통합당에 던진 질문을 마무리한다.

“5‧18로 맺힌 한(恨)은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수밖에 없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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