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창당] 창당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도약… "정치인은 선거로 인정받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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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창당] 창당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도약… "정치인은 선거로 인정받는 것"
  • 한설희 기자
  • 승인 2020.01.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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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85년 그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행동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이번 열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야당 연합의 정석’으로 자리 잡은 신민당의 탄생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야당 연합의 정석’으로 자리 잡은 신민당의 탄생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85년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 없이 관제야당인 민한당이 제1야당이 됐다면, 전두환이 두 번 더 집권했을지도 모른다. 신민당 돌풍으로 제1야당이 교체되고 군사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우리 ‘제3지대’도 잘만 그릇을 만들면 신민당처럼 될 수 있다.” -문병호 전 의원, 지난해 12월 4일 본지 인터뷰

“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추협이라는 ‘빅 텐트’를 기반으로 신민당이 선거 25일 앞두고 창당해 돌풍을 일으켰다. 미생모도 이처럼 ‘빅 텐트’를 통해 새로운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 -이정현 전 의원, 지난해 11월 21일 〈세계일보〉 인터뷰

“이런 식으로 한국당이 ‘무기력한 야당’으로 흘러가면,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제대로 된 강성 야당이 출현할 수 있다. 이 당이 85년 2월 총선에서 망해버린 민한당이 될 수도 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지난해 11월 6일 SNS 게시글

총선을 앞두고 제3지대의 빅 텐트를 비롯해 보수 통합을 꾀하는 야당 인사들에게, 1985년 탄생한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모델로 삼아야 할 ‘성공사례’다. 신민당은 창당 불과 25일 만에 서울 종로구를 기점으로 주요 지역에서 파죽지세의 승전보를 울렸고, 독재정부의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명실상부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신민당은 기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이철승계·신도환계·김재광계 등 비민추협 소수 계파까지 모두 아울렀던 ‘야당의 용광로’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야당 연합의 전설’로 자리 잡은 신민당의 탄생 과정이다.

1984.11.30. 3차 해금조치

12대 총선이 세 달도 남지 않은 시점, 정계의 초점은 정치인의 해금(解禁) 문제로 쏠렸다. 

전두환 정권은 장기 집권에 대한 포석으로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1980년 11월 3일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바 있다. 이 법률로 인해 ‘3김(YS·DJ·JP)’은 물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및 재야 지식인 567명의 참정권이 제한됐다. 

전두환이 비록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국민화합조치’의 일환으로 1984년 11월 30일까지 ‘3차 해금조치’를 단행했지만, 여전히 ‘3김’은 해금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12대 총선에 강제로 참여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3차에 걸친 해금 조치는 특히 양김(김영삼·김대중)에게 정치 조직 정비의 기회로 다가왔다. 해금 당사자들을 모아 정당을 꾸리면, 독재 정권과 제대로 맞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민당의 뿌리’인 민추협에 속해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 이땐 가는 길이 달랐지만 후에 한 길에서 만나게 된 ‘박정희 정권의 핵’ 김종필은 3차 해금조치 이후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저마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김영삼은 민추협 내 “전두환을 위한 총선에 들러리로 설 수 없다”고 주장하는 ‘총선 불참파’와 “정치인은 선거로 인정받는 것”이라는 ‘총선 참여파’의 분열 속에서 참여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비록 김영삼 본인은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국민에게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총선에 임박해서 발표된 해금조치는 자연스럽게 신당창당 가능성을 가늠해 보게 만들었다. 야권의 해금 당사자들은 민한당이나 국민당 입당을 매우 꺼려했다. 사실 민한당, 국민당은 구색을 갖추기 위한 ‘명목야당’에 불과했다. 대세는 역시 신당창당이었다. 

민추협의 신당참여 문제는 선거참여와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선거 거부파와 참여파의 양론은 팽팽했다. 거부파는 총선참여 자체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당시의 선거제도나 촉박한 일정으로 볼 때 선거에 참여해도 참패가 분명해 결과적으로 전두환정권의 들러리를 서 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략) 민주화의 불씨를 겨우 살려 민추협을 만들었는데, 총선참여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양상까지 빚어졌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나 자신은 정치규제로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야당을 창당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에게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시일이 촉박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억눌려 온 우리 국민들은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킬 기회만 마련된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신당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94~295쪽.

신군부 등장과 함께 영어의 신세가 돼 미국으로 건너가 야인 생활을 하던 김종필은 조용히 ‘야권의 기지개’를 지켜본다. 그는 다만 “악법(정치풍토쇄신법)도 법”, “나에겐 내 길이 있다”며 민추협에 함께하자는 김영삼의 제안을 거절하고 정치 일선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있었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는 김대중 씨의 측근인 김상현과 손잡고 범야권 연합체 결성에 나섰다. (중략) YS는 내게도 민추협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보내왔다. 구 공화당계로서 민추협에 가담한 중진 의원이 청구동으로 찾아와 같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양했다. 나를 포함한 3김이 아직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 있을 때였다. 1980년 11월 만든 소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른 규제였다. 악법도 법이고 법은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중략) 그 시절 나는 뒤로 비켜서 있었다. 뛰거나 걷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는 칩거했고 어느 땐 누워 있었다. 나의 그런 처신을 놓고 민주화 투쟁에 힘을 보태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옛 공화당 동지 몇몇은 내가 정치 재기의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YS‧DJ에겐 그들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내 길이 있었다. 꼭 그들과 함께 뛰고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25~127쪽.

한편 모처럼 활기를 띄게 된 야권에 대해, 군인 출신의 전두환과 노태우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전두환은 “정치 과잉의 계절”이 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나는 1980년의 위기를 빚어내던 정치사회적 혼란이 5공화국 출범을 계기로 차츰 수습이 되고 안정화되자 ‘정치풍토쇄신특별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던 정치인 등 피규제자들을 1983년과 1984년 세 차례에 걸쳐 풀어주었다.

1984년에 들어서자 정치 규제에서 풀린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연대를 모색하면서 활동을 넓혀갔다. 5.18 4주년을 앞두고 이들은 김영삼 씨와 미국에 머물고 있는 김대중 씨를 각각 구심점으로 하는 세력을 묶어 하나의 조직체를 만들자는 데 합의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김영삼 씨와 김상현(김대중의 대리인)씨를 공동의장으로 하여 산하에 16개국 32개 부서를 두는 방대한 조직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의 임기 후반은 강성 야당의 등장과 함께 정치 과잉의 계절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587~588쪽.

노태우 역시 이들을 향해 “주사파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 “반군적 세력”이라고 폄하한다.

1980년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 저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었다. 하나는 직‧간접적으로 북한의 조종을 받는, 이른바 주사파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고, 또 하나는 재야와 연계된 반군적 민주화 세력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304~305쪽.

‘신민당의 뿌리’인 민추협에 속해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신당 창당을 위해 힘을 모은다. ⓒ시사오늘 DB
‘신민당의 뿌리’인 민추협에 속해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신당 창당을 위해 힘을 모은다. ⓒ시사오늘 DB

1984.12.11. 민추협發 신당, 총선참여 전격 발표

‘총선 참여’로 가닥을 잡은 김영삼은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민추협 운영위 전체회의를 열고 참여 반대파를 적극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과정은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143)

그는 이후 비민추협 세력이었던 이철승과도 만나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을 창당하는 데 합의하고, 최종적으로 동교동계 대표 김상현과 함께 84년 12월 11일 이름 미정(未定)의 신당 총선 참여를 선언한다.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민추협 운영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대세는 총선참여 쪽이었다. 하지만 최종결정은 의장단에 일임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8일, 비민추협을 대표해서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이철승이 상도동으로 나를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나와 이철승은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을 창당한다는 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또한 두 사람은 전두환정권이 해금 70일 만인 1985년 2월 초에 선거를 치르겠다는 발상 자체가 원칙적으로 부정선거라는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사흘 뒤인 12월 11일, 나와 김대중 고문,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의 이름으로 민추협의 신당 및 총선참여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기구로서 민추협의 조직을 계속 유지확대강화하면서 범국민적 민주화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투쟁을 그 핵심으로 한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95~296쪽.

미국에 망명 중이라 동교동계 김상현을 대신 보내야 했던 김대중은 총선을 돕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한다. 신군부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던 터라 귀국에는 신변의 위협이 따랐지만, 김대중은 “선거 전에 조국의 땅을 밟아야겠다”며 귀국 날짜를 2월 8일, 즉 총선 나흘 전으로 잡는다.  

그래도 정치인의 해금 조치는 새로운 기운을 움트게 했다. 자연스럽게 신당 창당을 거론했다. 사실 당시의 민한당이나 국민당은 관제 야당이었다. 민추협을 모체로 해서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 12월 11일 나와 김영삼 공동의장, 김상현 공동의장 대행의 명의로 민추협의 신당 창당과 총선 참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민한당 소속이었던 의원들이 신당에 합류하려 대거 탈당했다.

(중략) 나는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일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나의 귀국이 총선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상황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동지들이 직간접으로 내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면서도 귀국 자체가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해 왔다. 그렇다면 선거 전에 조국의 땅을 밟아야 했다. 나는 2월 8일 서울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의 귀국이 임박하자 세계 언론이 하루하루 날짜를 헤아렸다. 귀국 길에는 37명이 내 신병을 염려하여 동행을 자청했다. 스스로 인간 방패가 되어준다는 것이었다. (중략)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나는 다시 목숨을 건 여행을 시작했다. 전 세계가 나를 ‘제2의 아키노’가 될지 모른다며 주시했다. 나는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483~487쪽.

 

84년 12월 20일,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전·현직 의원 등 120여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20일자 〈조선일보〉1면 하단에 창당대회 기사가 실려있다. ⓒ데이터베이스 조선
84년 12월 20일,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전·현직 의원 등 120여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해당 날짜 〈조선일보〉 신문 1면에 창당대회 기사가 실려있다. ⓒ데이터베이스 조선

1984.12.20. 신민당 창당발기인대회

84년 12월 20일,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전·현직 의원 등 120여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 창당준비위원장엔 이민우, 부위원장엔 민추협계 김녹영·조연하, 비민추협계 이기택·김수한·박용만 등 5명이 각각 선출됐다. 이들은 위원장단 산하기구로 총무·조직·정책·재정·선전 등 5개분과위원회와 지구당조직책 심사위 및 대변인을 두고, 필요한 경우에 특위를 구성하며 각 분과 위원회에는 위원장단이 임명하는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2인 등을 두도록 하는 규정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이날 창당발기 취지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정치부재의 한계 상황을 극복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며 “이것은 우리들 서민 대중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이며, 이러한 소명은 민주회복과 인간다운 삶을 절규하는 서민대중을 위한 지상명령이요, 반민주세력들에 대한 국민의 항쟁임을 결연히 선언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폭력에 의한 정치적 악순환은 어떤 명분, 어떠한 형태로든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자유민주주의적 참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만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의 창의력과 활력을 소생시키는 길이며 이 길은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여 재야의 모든 민주인사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힘을 모으는 일”이라고 선언해 군부 독재 철폐와 총선 참여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당초 이들은 1967년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당명을 신민당으로 정하려고 했지만, 전두환 정권하의 선관위가 이를 거부하면서 불발됐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그의 자서전에서 약칭만 신민당인 ‘신한민주당’으로 당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하늘의 축복인 양 하얀 눈이 쏟아졌다. 온 세상이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1984년 12월 20일, 이 날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신한민주당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새 야당의 당명을 ‘신한민주당’으로 정한 것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 온 정통야당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뜻이었다. 전두환정권은 과거 정당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신한민주당은 약칭으로 신민당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선명야당의 이름으로는 적격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97쪽.

1985.02.06. 이민우 종로 연설

전두환 정권은 12대 총선 날짜를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기습적으로 공표했다. 관행 상 3~4월쯤 총선이 치러지던 것과 비교되는 일정이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추울 때 선거를 하게 되면 여당에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는다.

전두환 정권은 날씨가 추울 때 선거를 하게 되면 여당에 유리하다는 계산에 따라 투표일을 혹한기로 잡았던 것이다. 더구나 신당은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못 되는 기간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선거전이 개막되면서 신민당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신당 돌풍’이라는 대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1~302쪽.

이때, 김영삼은 야당에겐 불리한 형국을 바꾸기 위해 한 가지 전략을 내놓게 된다.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중구에 중량감 있는 고위급 인사를 출마시켜 ‘신민당 바람’을 불러일으키자는 구상이었다.

신민당 초대 당수인 이민우가 이 역할에 적격이라고 판단한 김영삼은 이를 떠올리자마자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곧장 비밀리에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이민우를 만난다. 

내심 전국구 비례1번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민우는 제안을 듣자마자 “고희(古稀)를 넘긴 나를 사지(死地)로 보내려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여 반발했지만, 김영삼은 “정치 1번지 종로에 당의 존립(存立)이 달려 있다”는 간절한 말로 그를 설득해 총선 2주 전에야 뒤늦은 합동 유세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한두 석을 더 얻어내는 ‘작은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신민당 돌풍’이 전국을 강타하도록 만들어 거국적 승리를 이뤄내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나는 2‧12총선의 승부처를 종로‧중구로 잡았다. 종로‧중구는 우리나라의 정치 1번지로 불리는 곳이었다. 유권자의 정치의식도 높을 뿐 아니라 서울의 한복판이라는 위치로 인해 매번 선거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 신민당을 대표하는 이민우 총재를 출마시켜 돌풍을 일으킨다면, 신민당의 바람은 전국으로 크게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민우 씨를 직접 만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부산행은 군사작전같이 이루어졌다. (중략)

“아무래도 인석이 종로‧중구에 나가야 하겠어요.”
“그렇잖아도 얘기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됩니까. 나는 국회의원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전국구 1번도 않겠으니 제발 나를 나무 위에 올려 놓고 흔들지 마세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국회의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화를 위한 도전입니다. 비록 그곳에 연고가 없더라도 신당의 총재로서 출마하면 분위기가 달라질 겁니다.(중략)”

“좋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99~300쪽.

그리고 2월 6일, 김영삼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열린 이민우의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서, 약 10만 명의 인파가 모여 이민우와 신민당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올라가 연설을 듣는 모습까지 연출됐을 정도였다. 

이를 들은 김영삼은 “나의 판단이 명중했다”고 뿌듯해하며 ‘종로 바람’ 구상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이민우의 지명도까지 올린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작전이었다고 자평한다.

종로 중구를 정책지구로 선택한 나의 판단은 정확하게 명중했다. 이는 이곳을 신당 돌풍의 진원지로 삼기 위해 나와 내 동지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산이기도 했다. (중략) 정치 1번지인 종로중구의 선거열기를 더 한층 높인 것은 유세장에 몰려든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민우 총재의 지명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있던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은 전례 없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 총재와 연사들의 강도 높은 군사 정권 비판에 박수를 치며 “이민우, 이민우!”를 연호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3쪽.

미국 정치인과 언론인들에 둘러싸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DJ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미국 정치인과 언론인들에 둘러싸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DJ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1985.02.08. 김대중 ‘폭풍의 귀국’

총선을 목전에 둔 2월 8일, 결국 김대중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귀국에 성공한다. 경찰의 삼엄한 봉쇄를 뚫고 김포공항 주변에 수만 명의 환영 인파가 운집해 김대중을 연호하며 그의 귀국을 반겼다. 

그는 다만 전두환 정권의 강제력을 피하지는 못했다. 미국의 현직 의원과 국무부의 전직 고관이 한국 공항에 나서 김대중을 보호하려 했지만, 사복 경찰들이 기어코 그를 동교동 자택으로 끌고 가 가택연금 상태로 만든 것이다. 전화와 우편물, 언론과의 접촉은 모두 검열 당했으며, 김대중은 신민당 집회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1985년 2월 8일 오전 11시 40분, 꿈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중략) 공항 빌딩에 들어서자 갑자기 사복 경찰이 뛰어나왔다. 그러자 동행 인사들이 나를 에워쌌다. 경찰들은 나와 아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행 인사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보호했다. 이윽고 저들은 폭력을 행사했다. 공항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직 미국 의원과 국무부의 전직 고관이 함께 있는데도 동행 인사들은 사복 경찰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렸다.

(중략) 동교동 우리 집에 도착하니 집 주변에 천막이 높다랗게 드리워져 있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밖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앞 골목 모퉁이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중략) 경찰들은 다시 내 동교동 집을 철통같이 지켰다. 우리 집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가 되었다. 저들은 집 주변의 주택들을 빌리거나 사기도 했다. 그곳에 안기부 요원과 경찰을 상주시켰다. 경찰 수백 명이 몇 겹으로 집 주위를 둘러쌌다. 전화는 도청 당했고, 우편물은 검열 당했다. 저들은 언론의 인터뷰까지 방해했고, 내가 지은 책들은 서점에 진열하지도 못하게 했다. 집회 연설도, 모임에서 하는 발언도 방해했다. 심지어 신앙 체험 간증까지도 할 수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488~492쪽.

그럼에도 김대중은 “내 귀국으로 인해 12대 총선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 있었다”며 귀국 행위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회상한다. 또한 지역과 상관없이 신민당 후보들 모두 김대중의 이름값을 톡톡히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거 나흘 전이었지만 나의 귀국은 바람이었다. 총선은 예측 불허의 격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귀국 이후 나에 대한 가택 연금은 신당 후보들에게는 현장 유세 이상의 위력이 있었다. 강제로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다시 귀국했다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유권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폭풍의 귀국’은 선거 정국의 폭풍이었다. 신당 후보의 연단에서는 예외 없이 내 이야기가 나왔다. 충청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내 이름을 외쳤다. 어떤 후보는 나를 단독으로 만나 시국을 논의했다고 과장해서 말하기도 했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492쪽.

당시 김영삼 역시 정권의 감시 때문에 운신(運身)의 폭이 넓지 못한 상황이었다. 김영삼이 선거에 끼칠 영향을 염려했던 전두환 정권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 달가량 그를 상도동 자택에 연금시켰다. 김대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회 참여를 막은 것이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전두환 정권은 내가 전국을 누비는 것을 두려워했다”며 어쩔 수 없이 조직 배후에서 선거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밝혔다.

나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귀가한 지 얼마 안 돼 기동경찰 수백명이 집 앞으로 몰려들었고, 나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 달 가까이 상도동에 연금되어 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내가 전국을 누비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연금은 선거가 끝나고도 한 열흘쯤 뒤에나 풀렸다.

비록 연금을 당해 전국을 다니거나 대중 집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실제로 나는 이민우씨의 당선을 위해 조직관리를 비롯해서 선거의 모든 것을 지휘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2~303쪽.

1985.02.12. 제12대 총선

마침내 결전의 날인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의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전두환의 독재정치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는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예상대로 이민우의 종로 출마는 ‘신민당 돌풍’을 불러와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신민당은 서울·부산·인천 등 대도시에서 승리를 거두고 향후 정치민주화를 가져오는 ‘태풍의 눈’이 됐다. ‘관제야당’ 민한당이 전국구 포함 3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신민당이 67석이라는 두 배에 가까운 성과를 보인 셈이다.

과거 전두환 정권하에서 치러진 각종 선거는 정권의 개입과 협박, 매수로 얼룩져 있었고, 국민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점차 커지던 때였다. 이 상황에서 실시된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김영삼은 이를 ‘선거혁명’이라고 칭하면서, 언론과 동료들의 부정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단식투쟁을 비롯해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조직, ‘종로 구상’ 등 본인의 공(功)이 컸다고 주장한다. 

마침내 1985년 2월 12일 투표함이 열리자 정부‧여당은 경악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신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1월 18일 창당한 지 불과 25일 만에 얻은 눈부신 성과였다. ‘선거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12대 총선 결과에 대해 대부분의 정치인과 언론에서는 신민당 지역구에서 20석 내외를 차지, 민한당에 이어 제3당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나는 신민당이 총선에서 50석 이상을 획득할 것이 틀림없다고 공언했다. 일반의 예상과는 너무나 격차가 크다며 주변에서는 나의 전망이 실언이 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언론에서는 “2‧12총선은 김영삼의 작품”이라고 보도했다.

야권이 정치적 동면에서 깨어난 것은 나의 단식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내가 심혈을 기울인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은 신민당의 산파 노릇을 했다. 그 신민당이 선거투쟁에 참가, 2‧12총선에서 선거혁명을 성공시킨 데 대해 나는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4~305쪽.

승리를 확신했던 김영삼과 다르게, 김대중은 12대 총선 결과를 “믿기지 않은 야당의 선전”이었다고 회상한다. 이어 김영삼처럼 승리의 공(功)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귀국을 ‘9회말 역전 만루 홈런’에 비유하고 있다.

국민도, 정부 여당도 그리고 신민당 내부에서도 믿기지 않은 야당의 선전이었다. 참다운 야당 출현을 국민들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민주화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헌법을 바꿔서 직접 ‘우리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표심이었다. 결국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은 국민들의 민주 의식과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총선 전 귀국은 야구로 치면 승부를 뒤집는 9회말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중략)12대 총선은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침몰시켰다. 총선이 끝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민한당 당선자 35명 중 29명이 신민당에 입당했다.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의 명령이었다. 민한당은 민심의 바다에서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 야당으로 우뚝 섰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493쪽.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전두환 또한 12대 총선 ‘신민당 돌풍’에 본인이 기여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여당이 반대했지만 대한민국 정치 발전을 위해 야당 정치인들에게 해금 조치를 내려줬다”면서 “민한당의 패배와 정국 변화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궤변을 내세운다.

이 같은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치풍토쇄신특별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567명의 정치인 가운데 1983년 12월 1차로 250명을 해금한 것을 시작으로 2.12총선이 두 달 남짓 남은 시점인 1984년 11월 말에 구여권의 김종필, 이후락,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 씨 등 15명만 제외하고 모두 풀어주었다. 나는 2.12총선 직후인 1985년 3월 6일 이들 나머지 15명도 전원 해금했다.

이때 여권 내에서는 이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게 되면 정국을 강경 분위기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우리나라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정치적 이유로 특정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일이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모두 풀어주었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589쪽.

12대 총선 승리 직후 정치풍토쇄신법으로 규제에 묶여 있던 마지막 14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된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 모두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뉴시스
12대 총선 승리 직후 정치풍토쇄신법으로 규제에 묶여 있던 마지막 14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된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 모두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뉴시스

1985.03.06. 3김 해금조치

정치풍토쇄신법으로 규제에 묶여 있던 마지막 14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된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 모두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총선에 끝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3월 6일, 소위 정치풍토 쇄신 관련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되고 있던 마지막 대상자 14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됐다. 최종 해금된 야권 인사는 나와 김대중, 김상현, 홍영기, 윤혁표, 김윤식, 김덕룡이었다. 실로 4년 4개월 만에 정치활동의 자유를 획득한 셈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5쪽.

미국에 있던 김종필도 소식을 듣게 됐지만, 정계 복귀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룬 채 계속 체류하다가 이후 1986년 2월 25일 옛 공화당 인사 300여 명의 환호 속에 귀국한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며 김영삼, 김대중과는 결이 다른 ‘정치 인생 2막’을 열겠다고 다짐한다.

1985년 3월 6일 서울에서 딸 예리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그 직전 2‧12 총선에서 야당 바람이 불었고 정국 흐름이 급변하고 있었다. 예리가 나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가 풀렸다는 통보가 왔다고 전했다. 4년 4개월 만에 정치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묶여 있던 YS‧DJ를 포함한 13명도 이날을 기해 모두 해금됐다. 나는 담담해지만 정치권은 술렁였다. 내가 언제 귀국하는지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기자가 찾아와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나는 “때가 오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고 답했다. 서울에서 종익‧종락 형님이 차례로 찾아와 내게 귀국 시기를 물었지만 내 대답은 같았다. “현재로서는 결정한 바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고만 말했다.

(중략) 1986년 2월 25일 나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1년 7개월 만이었다. 내 귀국을 기다려온 옛 공화당 인사 300여 명이 김포공항으로 몰려나와 환영해 주었다. 그들의 박수에 화답하기 위해 대합실 의자 위에 올라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답례 제스처를 했다.

(중략) 공항에서 곧장 국립묘지로 직행해 고 박정희 대통령 묘소부터 참배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그새 7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추도식 한 번 열지 못했다. 송구하고 죄스러운 심정뿐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서서 속으로 말씀드렸다.

‘이제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지난날에 못다 한 일을 이룩하려 합니다. 한 번 지켜봐 주시지요.’

바야흐로 나의 정치 생애 제2막을 열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27~129쪽.

반면 전두환과 노태우는 12대 총선 이후 힘을 얻고 반독재 투쟁에 나선 야당과 재야 민주 세력들을 향해 ‘언짢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전두환은 ‘주사파의 등장’과 여야 충돌로 인한 ‘국회 공전 현상’을 언급하며 총선 이후의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를 거듭 강조한다. 

12대 총선 이후의 정치상황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대학가에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을 비롯해 좌경세력들이 조직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85년 5월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던 삼민투 외에 1986년 4월 결성된 자민투, 민민투 등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들이 ‘민주화 투쟁’을 위장하며 반미-반정부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중략) 이러한 정치상황의 변화에 대응해서 나는 총선이 끝난 직후 국무총리에 노신영 안기부장을, 민정당 대표에는 12대 국회에 전국구로 진출한 노태우 의원을 임명하는 등 정부여당의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12대 국회는 야당이 김대중 씨 등의 사면복권을 선결하라는 요구를 하며 개원을 지연시킴으로써 임기 개시 후 33일 만에야 겨우 임시국회를 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야당의원들이 선명성 경쟁을 하듯 잇따라 과격 발언을 함으로써 여야 간 격돌이 벌어지고 국회가 공전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590쪽.

노태우는 더 나아가 김대중과 김영삼의 권력 투쟁 때문에 박정희 정권처럼 ‘1980년 서울의 봄(10·26 및 5·17 비상계엄 조치)’ 같은 정치적 과도기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827)

2‧12총선으로 확인된 민심을 등에 업고 야당이 선명투쟁으로 나서자 학생, 종교, 사회단체, 언론기관도 신민당 편이 되었다.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기치 아래 단결하여 여론을 주도해 갔다. 선거 직전에 미국에서 귀국한 김대중 씨는 김영삼 씨가 선점한 신민당과는 별도로 이들 재야 세력을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서로 협력‧견제‧경쟁해 가면서 대통령과 민정당을 밀어붙였다. 1980년 봄의 사태가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와 차이점은 강력한 정권의 존재였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309쪽.

 

“신민당, 수도권 돌풍으로 정권 무너뜨려… 야권통합은 신민당처럼”

12대 총선으로 추진력을 얻은 신민당은 재야의 민주세력과 함께 1987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이와 관련해 장기표 국민의소리 공동대표도 지난 2018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78년 총선에서 야당의 선전으로 박정희 정권이 흔들렸던 것처럼, 85년 12대 총선 돌풍이 전두환 정권을 흔들었다”며 “12대 총선의 6·10 민주항쟁 촉발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한 바 있다.

창당 25일 만에 민의를 반영해 제1야당 자리를 꿰차고, 나아가 정권 교체를 이뤄낸 신민당. 35년이 지난 지금도 야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신민당 사례’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지난 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번 총선에서도 야권 통합 과정에서 신민당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신민당을 주도해 계파들을 규합했듯, 용광로가 될 수 있는 정당에서 만나 그 안에서 대권 경쟁을 하면 된다”고 분석했다.

'2020년 버전'의 신민당은 탄생할 수 있을까. 제3지대의 정치세력이 통합의 물꼬를 열 것인가, 누군가의 바람대로 제도권 정치인들이 주도할 것인가. '열쇠를 쥔 자', 신민당의 후예에게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는 시점이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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