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①] “민주주의의 새벽이 오고 있다”
[부마항쟁①] “민주주의의 새벽이 오고 있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10.14 2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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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79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6일 국가기념일을 앞둔 부마항쟁을 주축으로 한 막전막후(幕前幕後)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6일 국가기념일을 앞둔 부마항쟁을 주축으로 한 막전막후(幕前幕後)다.ⓒ시사오늘 김유종

분노는 점층적이다. 분노가 표면 위로 드러나는 건, 그 아래 무수히 많은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분명 유신 체제는 김재규가 쏜 몇 발의 총성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 총알에는 어린 YH 여공들의 울부짖음이 있었으며, 김영삼(YS)의 투쟁이 있었으며, 부산과 마산 대학생들의 용기가 어려 있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6일 국가기념일을 앞둔 부마항쟁을 주축으로 한 막전막후(幕前幕後)다.


1979.05.30. YS 신민당 당 총재 당선

유신 체제의 변곡점은 1979년 5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5월 30일 신민당은 마포 당사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당 총재 선거를 진행했다.

1차 투표 결과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로, 모든 후보가 재석 751명 중 과반수 376표에 미달됐다. 이에 2차 투표(결선 투표)를 앞두고 3‧4위였던 이기택‧신도환의 행보에 모두가 주목했다. 두 후보의 표에 새로운 신민당 총재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택을 끌고 창가로 갔다.

“이 동지,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저것이 신민당에 보내는 국민의 함성이요.”

우리 둘이 창가로 다가가자, 그때까지 “김영삼”하고 외쳐대던 함성은 “김영삼! 이기택!”을 연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기택이 마침내 나의 손을 잡았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12~116쪽.

결국 3위였던 이기택이 김영삼을, 4위였던 신도환이 이철승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2차 투표 결과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11표 차 역전극이 펼쳐졌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둔 신민당사의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1979년 신민당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둔 신민당사의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은 당선 직후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다”며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당시 김대중은 두 후보 중 누구를 지지했을까. 김대중은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이철승을 ‘유신체제에 어정쩡하게 얹혀있다’고, 김영삼을 ‘유신 체제 반대를 가장 확실하게 주장한다’고 평가했다.

비록 당시 김영삼 씨와는 경쟁 관계지만 내가 진심으로 김 후보를 밀고 있다는 것을 설득해야 했다. 실제로 당내의 다른 후보가 “김영삼 씨를 당선시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유신의 종결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욕심은 버렸다”고 말했다.

(중략) 이기택 씨가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나는 급히 이기택 씨에게 메모를 썼다. 그리고 이기택 씨 부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약을 가져다준다며 보온병을 가지고 이기택 씨에게 다가가 은밀히 메모를 전했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김영삼 후보를 밀어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모두가 패자가 될 것입니다. 이기택 동지도 민주주의를 위해 나오셨으니 믿겠습니다.”

- 김대중 자서전, 374~376쪽.

김영삼의 당선은 유신의 핵, 박정희와의 충돌을 가시화했다. 

앞서 김영삼은 당 대회를 1주일 앞둔 5월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도전은 당권 도전이 아니라 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결코 당내의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을 상대로 하는 당권 도전이아니라 박 정권을 상대로 하는 집권 투쟁”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김종필은 이를 두고 ‘피할 수 없는 대결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1979년 5월 YS는 선명 야당 회복을 외치며 총재에 다시 올랐다. 비타협적인 YS 노선으로 인해 정국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중략) 박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4~16쪽.


1979.08.09~11. YH 사건

YH 무역은 가발 회사였다. YH 무역 농성은 회사의 불법 해고, 부당 전직 및 전출 등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반발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8월 6일 회사는 폐업을 일방적으로 공고에 따라 노동자들이 9일 야당인 신민당을 찾으면서 사건이 커졌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내가 여공들을 내몰면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며 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줬다.

나는 이때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농성장소로 택한 줄은 몰랐고, 호소 차 방문한 것 정도로 알았다. 여공들은 9시 30분쯤 곧장 당사 4층으로 올라가 농성에 돌입했다. (중략) 나는 이 불쌍한 여공들을 내몰면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보사부 장관들과 노동청장에게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했으나 아무런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10일 낮 여야 총무회담을 열어 국회에서 논의할 것을 제안토록 했으나 여당 측은 거부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35~144쪽.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자 종업원들을 경찰들이 끌어내고 있는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자 종업원들을 경찰들이 끌어내고 있는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은 국회에서 해결책을 강구할 것을 제안했으나, 여당에서는 고용자와 피고용자 간에 빚어진 사태로 정치권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11일 새벽 2시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사에 경찰을 투입해 여공들을 강제 진압했다. 이른바 101작전이었다.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공들뿐만 아니라 취재 중이던 기자, 신민당원 및 의원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에 김영삼은 ‘16세기에나 있었던 일’이라며 비판했다.

101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농성근로자 강제해산 작전이 시작됐다. (중략) 천여 명의 정복, 사복 경찰관이 한꺼번에 담을 넘어 들어왔다. 신민당원들은 현관 셔터를 내려 경찰진입을 막으려 했다.(중략) 우리는 훈련된 무장경찰관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당원들은 경찰에게 무수히 얻어맞은 뒤 버스에 실려졌다. (중략) 4인 1조의 경찰관들은 반항하면 여공들을 10여분 만에 모두 끌고 나갔다. 반항하면 두들겨 팼고, 여공들은 버스 안에서 울부짖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35~144쪽.

당시 여공들은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내 걸고 싸워왔다. 11일 새벽 창밖으로 뛰어내린 김경숙 씨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양 김씨는 YH 사건을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 진 꼴’, ‘착한 우리 딸들이 유신의 광기어린 폭력에 유린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창 밖으로 뛰어내린 김경숙 양이 발견된 것은 이런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한 새벽 2시 3분께였다. (중략) 처음 당국은 김양의 죽음 자체를 비밀에 부치려고 거짓 발표까지 했으나, 언론의 눈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중략) 김양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농성 중이던 YH 여공들에게 식사를 날라 주던 인근식당 여종업원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략) 그러나 경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 진 꼴이 되었다. 당원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기자들을 무차별 구타함으로써, 야당의 극한투쟁을 불렀고 국민을 분노케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35~144쪽.

경찰의 야당 당사 무력 난입은 유신 정권이 폭력을 쓰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서 일하며 부모님 약값과 동생 학비를 보내 주던 착한 우리 딸들은 이렇게 유신의 광기어린 폭력에 유린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376~379쪽.

그렇게 신민당에서의 YH 여공들의 농성은 18일 만인 8월 28일 김경숙 씨의 추도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79.09.08. YS 신민당 총재직 가처분 결정

신민당 당사에서 한창 YH 여공들이 농성을 벌이던 13일, 원외지구당 위원장인 유기준·윤완중·조일환은 총재단의 집무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가처분 신청이란 빠른 시간 안에 법원의 결정을 구하는 제도로, 긴급을 요하는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9월 8일 서울 민사지법합의 16부의 조언 부장판사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 직무 대행자로 선임하기에 이른다.

김영삼은 이를 두고 ‘모든 것이 박정희 공작공치의 소산’이라고 평가했다.

정당 대표가 법원의 결정으로 집무집행이 정지된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9월 10일 기자회견에서 “가처분결정은 정치권력에 의한 조작극일 뿐만 아니라, 헌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정당의 지도기능이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승복할 수 없다”고 법원의 결정에 대해 불복을 선언했다. 

내가 정권타도를 공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나의 성명과 발언에 대해 극도로 격앙되었다. 박정희는 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서둘러 기정사실화하려고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45~148쪽.

한편 김대중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을 ‘박 정권의 광기에 대항할 방법은 별로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제1야당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했는데도 박 정권의 광기에 대항할 방법은 별로 없었다. 오직 농성뿐이었다. 그런 박 정권은 오히려 보란 듯이 정치 공작을 꾸몄다. 세 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을 시켜 김영삼 총재에 대해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토록 했다. 

- 김대중 자서전, 376~379쪽.


1979.10.04. YS 제명 

박정희 정권의 김영삼 탄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9월 8일 뉴욕 타임즈(NY)와의 기자회견이 발단이었다. 당시 김영삼은 인터뷰 중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다. 이에 박정희는 인터뷰 내용을 문제 삼고 국회에서 제명하려 한다.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의 제명 안이 무기명 비밀투표에 붙여 통과되면서 약 20분 만에 김영삼의 제명을 확정했다. 이로써 김영삼은 헌정 사상 최초로 제명됐다.
 
김영삼은 10월 3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 중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다.

제명되기 전날인 10월 3일, “할 얘기가 있으니 꼭 좀 만나달라”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간청을 받아들여 장충동 정보부장 공관에서 나는 김재규를 만났다. (중략) 그는 시종 차분하게 얘기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나라도 총재님도 불행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합니다.”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
(중략)
“내일 아침에 국회에 나갈 때 잠깐만 기자실에 들렀다가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자들과 우연히 환담하는 척하면서 <뉴욕타임즈>의 회견내용이 와전되었다고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중략)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분명히 내가 한 말이고, 사실인데, 왜 취소를 하냐. 나는 제명을 택하겠다. 구속을 한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53~161쪽.

故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 故 박정희 전 대통령ⓒ뉴시스
故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 故 박정희 전 대통령ⓒ뉴시스

한편 김종필은 김영삼 제명에 대한 논의 과정을 회고하며, 그는 제명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고 서술했다. 이어 박정희를 ‘뼛속까지 민족주의자’라고 칭하며 그의 눈에는 김영삼의 행태가 ‘사대주의’로 비쳤을 것이라 추측했다.

사실 전날 YS제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중략) 서울시청 앞 플라자 호텔에서 오찬 회의가 열렸다. 박준규 당의장 서리가 대통령 지침이라며 YS 제명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아무리 대통령 뜻이라 해도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효상 고문도 내 말에 공감을 표시했지만 분위기는 제명 쪽으로 흘러갔다.

김 총재를 제명한 직접적 원인은 미국 <뉴욕타임즈> 9월 16일자 인터뷰였다. (중략)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한국의 정치인이 국내 문제를 외국 언론에 고자질해서 해결하려는 발상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인 대통령의 눈엔 김 총재의 행태는 명백한 사대주의로 비쳤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12~14쪽.

또한 김종필은 김영삼을 ‘화가 나면 전후좌우 생각하지 않고 마구 직선적으로 말하는 스타일’, ‘고집도 셌고 타협을 몰랐다’고 회고했다.

내가 보기에도 (YS는) 화가 나면 전후좌우 생각하지 않고 마구 직선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고집도 셌다. (중략) YS는 타협을 몰랐다. YS는 국회에서 박 대통령을 좋게 얘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좋은 얘기도 자꾸 하면 흠이 나오는 법인데, 나쁜 얘기를 계속해서 해대니까 그게 쌓여서 대단한 증오로 변했다.

-김종필 증언록 2권, 12~14쪽.


(다음 편에 계속)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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