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막 추적 - 극일(克日)과 기업 전쟁 [이병도의 時代架橋]
스크롤 이동 상태바
내막 추적 - 극일(克日)과 기업 전쟁 [이병도의 時代架橋]
  • 이병도 주필
  • 승인 2023.10.21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5년 만에 처음 일본에 역전
기술격차가 문제 본질…국가미래 대비를
기업이 살아야 극일(克日)도 가능
한·일 경제전쟁, 초기 산업피해 관건
기업관과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한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18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노동조합법 개정안 입법 추진 중단과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유예를 요구하며 열린 에서 참석자들이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18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노동조합법 개정안 입법 추진 중단과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유예를 요구하며 열린 에서 참석자들이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겉과 속은 다르다. 한·일 관계가 호전되고 있다고는 하나, 실질은 변한것이 없다. 양국이 본격적인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다. 올해 한국의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에 처음 일본에 역전당할 것이 확실시된다. 어차피 일본도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닥칠 피해가 적지 않다. 일본은 이미 자동차용 배터리와 화학제품으로까지 규제 대상을 확대할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경제·산업 전방위로 확산될 조짐이다.

당장 올해 한국의 성장률은 ‘만년 저성장국’ 일본보다 낮아질 전망이다. IMF는 7월 전망에서 1.4%로 한국과 동일하게 잡았던 올해 일본 성장률을 이번엔 2.0%로 0.6%포인트나 끌어올렸다. ‘엔저 특수’를 누리는 수출 기업들이 공격적 투자에 나서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일본으로 몰리면서 서비스업까지 살아나 경기가 활력을 띠고 있어서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등 주력 수출산업의 글로벌 경기 침체로 원화 약세의 플러스 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수입물가 급등이란 부작용만 커지는 중이다. 약화돼 있던 경제 기초체력이 한국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이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등 공격으로 우리 기업이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피해를 보게 되면 그 규모는 헤아리기 어렵다. 경제 전쟁을 직접 치러야 하는 기업이 살아야 극일(克日)도 가능하다.

중소기업은 이런 불확실성에서 더 위태롭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일본의 수출 제한과 관련해 중소제조업 269개사를 조사한 결과 일본의 수출 규제가 지속되면 10곳 중 6곳은 6개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답했다. 한국경제는 내외 악재의 중첩으로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게 됐다.

직접적인 피해자는 역시 기업이다. 이미 기업들은 실적악화에다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대형악재만으로도 벅차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로 사태를 이겨냈던 경우와도 또 다르다.

기초과학 토대 다시 세워야

문제의 본질은 일본과의 기술격차다. 여기에 대한민국 국가미래의 큰 함정이 도사린다. 정부 계획대로 일본과의 격차를 줄이는 ‘기술자립’을 이루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대 과제다.

우리는 이미 1990년대부터 소재·부품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 차원의 계획을 수립해 실천에 옮겼다. 2001년 ‘부품·소재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만들었고 2010년 ‘10대 소재 국산화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일본의 공격에 노출된 것은 세계에서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고급 부품과 고급 소재를 아직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껏 단 한해도 일본과의 무역역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는 소재·부품 국산화를 구호로만 주장했을 뿐, 보다 근본이 되는 기초과학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다. 기초과학은 당장 결과물을 만들 수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분야다.

일본이 지금의 기술 경쟁력을 갖춘 바탕에는 전후 기초과학에 꾸준히 투자해 배출한 2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우리가 진정한 기술자립을 이루려면 그 밑에 기초과학이라는 탄탄한 토대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난 30년 가까이 부품과 소재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한결같이 외쳤어도 별로 나아진 게 없는 전철만 계속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 대학, 연구기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위기 극복의 중심은 역시 기업들이다. 정부는 말로만이 아니라 난국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업들의 기(氣)를 살려서 기초 기술경쟁력 등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인 기업가정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경제환경을 조성해 나가야만 한다.

‘기업현장’에 바탕한 정책 구상을

현재 일본의 보복으로 가장 충격에 휩싸인 건 산업계다. 5대 그룹은 일제히 ‘비상경영체제’를 본격 가동했다. 시나리오별 점검, 소재·부품 재고 확보, 대체 공급처 물색 등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대비하는 모습이다. 중소기업들도 후폭풍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장 6개월도 버티지 못한다는 중소기업이 절반이 넘는다. 소재·부품 관련 기업과 인력 양성에 앞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보유한 기업과 기업인, 관련 전문가 등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급한 기업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대책을 내놔도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소재·부품 국산화만 해도 적지않은 시간이 걸려 당장의 대안이 되기 어렵다.

수출규제 영향권에 들어간 업종과 기업이 대폭 늘어난 데다 저마다 처한 현실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산업 전반에 걸친 과감한 대책과 함께 맞춤형 지원이 절실하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기업들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이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업인과 전문가들의 의욕을 꺾고 경제 활력까지 앗아가는 규제부터 걷어내야 한다.

또한, 소재·부품·장비의 경쟁력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려면 중소기업을 더 지원하고 더 확실히 배려해야 한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게만 맡기지 말고 중소기업과도 다양한 채널로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2010년 출범했던 동반성장위원회가 이익공유 등 대·중소기업 상생을 시도하겠다고 장담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중소기업 제품을 대기업이 외면했다거나 구매한 뒤 어음으로 결제해 자금회전이 어려웠다는 불평 등은 더이상 나오지 않아야 한다. 정부의 정책 발표에서도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 산하에 대·중소기업 상생협의회를 설치하고 상생품목을 육성하겠다고 했는데, 결코 구두선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감정’보다 실사구시 추구해야

당장 급한 것은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치명상을 입을 위기에 처한 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살길을 찾아주는 것이다. 일본 외 대체 구매처 확보를 위한 예산·세제 지원, 기술 개발을 위한 규제 개선 등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기업 지원 대책이 절실하다.

지금 삼성·SK 등 기업들은 비상회의를 여는 등 일본 수출규제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위기 극복을 넘어 이번 기회에 내실을 더 다져 새로운 사업기회를 창출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정부 여당이 할 일은 피해를 최소화할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고 기업이 경쟁력을 키우도록 정책·입법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감정에서 벗어나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는것이 중요하다.

대응조치는 실익 고려

우리의 대응조치는 실익을 고려해야 한다. 국제분업과 산업생태계의 큰 틀에서 한·일 산업의 비교우위를 따져 정밀 타격하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

북한이 자고 나면 미사일 도발에 나서고 비핵화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제재도 여전하다. 한반도 정세가 살얼음판을 걷는 마당에 남북경제협력과 평화경제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는 예산·금융·규제완화 등 가용한 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한다. 화급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보복조치로 공장이 멈추거나 수출이 중단되는 사태를 막는 것이다. 과연 20개 핵심품목을 1년 만에 국산화하거나 대체할 수 있겠는가. 수십년간 이어져 온 한·일 기술격차가 정부 대책만으로 뚝딱 해결될 일은 아니다.

정부가 몇 년 걸릴지도 모를 소재·부품 국산화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기업들은 몇 달이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삼성전자만 해도 한 해에 20조 원 가까운 연구·개발(R&D) 투자를 하는데, 정부의 1조 원 지원으로 획기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글로벌 경제 전쟁은 현실이다. 냉철하게 외교 해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상대적 자충수 주의…냉철한 외교해법 중요

지난해 한국은 일본에 305억 달러어치 상품을 수출하고 546억 달러어치를 수입해 무역적자가 241억 달러였다. 무역역조는 대일 무역에서 항상적 두통거리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뚫기 어려운 시장으로 수출을 늘리는 것이 우리 이익에 부합한다. 대일본 수출 절차를 까다롭게 할 경우 가뜩이나 수출 부진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는 대체 가능성이 떨어지는 부품·소재 중심이어서 우리 경제를 타격하는 효과는 크면서 자신들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한국이 일본에 수출하는 상품은 석유제품, 철강, 반도체 등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제품이 주축인데 대부분 다른 국가 제품으로 대체 가능하다.

손실은 주겠지만 치명적이지 않고 수출 감소에 따른 우리 피해가 더 클 가능성이 높다. 대일 수출규제는 쓸 수 있는 카드 중 하나지만 치밀한 논리와 정밀타격 효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되레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자칫 어렵게 뚫은 일본 시장만 스스로 차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70%에 이르는 D램 반도체로 맞보복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이 역시 대만 등으로 수입처를 돌리면 그만이다.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 수입을 한국(17%)보다 대만(59%)에 3배 이상 의존하고 있다. 이런 대응은 일본의 기존 보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추가 보복 빌미도 된다.

규제개혁 노동개혁 시급

기본적으로, 벼랑 끝에 놓인 한국 경제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선 정부가 기존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기업과 소비자들이 투자와 소비에 다시 나설 수 있도록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혁신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규제개혁이다. 그동안 환경당국에서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 등록·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내세워 영업비밀까지 공개하라며 기업을 다그쳐왔다.

환경부를 비롯한 규제 부처에 최근 3년 사이 공무원이 25%가량 늘어났다고 하는데 공무원이 늘어나면 규제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업에 대한 단기적인 자금지원과 별도로 이들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환경규제·의료규제 등을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기업인 존중 분위기 조성을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과 주52시간 근로제 등으로 기업 생태계가 고통 받는 상황에서 일사불란한 대일본 경제전쟁 대비태세가 갖춰지기는 쉽지 않다.

탈원전 정책도 재고돼야 마땅하다. 국가적으로 전력조달 비용을 굳이 높게 부담하면서 외국과 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번 싸움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내다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장기적인 대비책이 필요하다. 정부와 경제계가 혼연일체를 이루는 자세가 요구된다. 정부가 싸움을 지휘하더라도 현장에서는 기업들이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기업들에 대해 정책적인 신뢰를 줘야만 한다.

한·일 갈등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아닌 기업이다. 하지만 두 나라 재계는 정치권의 위세에 눌려 제 목소리조차 못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한국 경제단체 5곳은 공동성명에서  "한·일 호혜적 발전을 위해선 외교·안보 이슈가 민간 교류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 재계도 소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파결이 나온 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등 경제단체 4곳은 "(이번 판결로) 한·일 관계가 손상될 수 있을 것으로 깊이 우려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백색국가 파문 과정에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우리는 두 나라 재계가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을 모으길 바란다. 한·일 양국 정부는 응당 최대 피해자인 기업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부는 기업 경쟁력을 키우고 부품·소재 투자 등 경제활력을 불어넣는 쪽으로 정책기조를 대전환해야 한다. 경제 비상시국에 맞추어 법인세 인하와 주 52시간 근로제 수정, 파업 시 대체근로 인정 등의 조치도 적극 검토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국가대표들이다.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애국자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들이 줄지어 해외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 국내 투자와 고용을 늘리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기업인이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했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 <YS 대권전쟁>,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부사>, <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 평소 역사주의와 세계주의를 기준으로 한 집필 경향을 보여왔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