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되짚기②] 함운경 “이인영 등 전대협 세대의 방향 전환이 독재 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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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되짚기②] 함운경 “이인영 등 전대협 세대의 방향 전환이 독재 타도”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6.15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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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권 무너트렸지만, 낡은 사상 갖고 싸운 패착의 결과는 컸다”
“새로운 세상, 시스템 대안 준비 못해, 이러려고 젊음 바쳤나 회환도”
“운동권 출신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지 않나, 선한 의도만으로 안 돼”
“사람들이 선하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제도, 시스템 만들어주는 게 중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82학번을 두고 ‘똥파리’라고 했다.
감옥도 불사하겠다는 학생들의 대기 순번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하자 생긴 변화였다.
그리고 또 하나, 변화의 물꼬를 터준 것이 있었다.
이인영 등 전대협, 주사파 세대의 방향 전환이었다.
그 시절 대학가는, 모르긴 몰라도 86, 87년이 되면 혁명이 일어날 거로 봤다
무력으로 전두환 군사 정권을 타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대협 세대가 직선제 쟁취로, 요구수준을 낮췄다.
새로운 변화였고, 폭발적 지지를 얻었다.
바로 이 점이 6월 항쟁이 되기까지의 결정타였다고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했던 ‘함운경’은 평가했다.
물론 “추가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6월 항쟁 되짚기 초기 기획자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직선제 개헌은 12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에서 가장 먼저 꺼낸 카드였다”며
“YS가 대통령직선제 개헌 천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면서 
정치권, 재야로 번진 이 불길이 학생 운동권으로까지 옮겨 붙은 것“이라고 부연했다.
차치하고,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요즘의 모습이 그 시절 꿈 꿨던 세상인가 하면, 아닌 것 같다고 이러려고 젊음을 바쳤는가, 회환도 밀려온다고 '함운경’은 말했다. 이런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낡은 사상을 갖고 싸운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 시대 패착이라면, 지금 우리는 잘 가고 있을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이상은 ‘함운경’과의 인터뷰를 통해 세상 밖으로 던져진 물음이다.

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군사 정권 퇴진을 이루고 직선제를 쟁취하고, 민주화를 이뤘다. 그러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또 한편으로 여러 생각이 드는 듯했다. 사진은 역 대합실에서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주동자 함운경 당시 삼민투 위원장의 뒷모습.ⓒ시사오늘
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군사 정권 퇴진을 이루고 직선제를 쟁취하고, 민주화를 이뤘다. 그러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또 한편으로 여러 생각이 드는 듯했다. 사진은 역 대합실에서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주동자 함운경 당시 삼민투 위원장의 뒷모습.ⓒ시사오늘

6월 항쟁으로 가는 길목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의 되짚기

87년 6‧10 민주항쟁이 오기까지의 주춧돌은 하나가 아니었다. 작은 날개 짓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있다면 85년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도 그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다. 5‧18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데 획을 그은 사건 -> 학원가 시위 확산 -> 전두환 정권의 무차별 탄압 ->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 -> 6월 항쟁 -> 노태우의 6‧29 선언 -> 직선제 개헌 쟁취 -> 전두환 군사정권의 퇴진을 놓고 보면 비약적 해석은 아닐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은 물론, 미 문화원 점거하면, 상징적으로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서울대 82학번 물리학과 4학년이었던, 함운경 당시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이다. 그는 현재 전북 군산에서 온오프라인 생선가게 (주)네모선장을 운영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3일 함 대표를 만난 날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의미심장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난 날(85년 5월 23일)이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내려온 군산이었다. 마침 함 대표도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 또한, 미 문화원 점거 농성과 연관이 있었다. 해마다 5월 23일이 되면, 점거 농성을 함께했던 학우들과 만나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그날은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군산에서 서울까지의 이동 시간 안에 진행됐다. 군산 수송동에서 차타고 익산 역, 그리고 용산 역까지, 우리의 대화는 의식의 흐름 따라 진행됐다. 별다른 가감 없이 날 것 그대로 옮겨도 좋다고 생각돼 공간 이동에 따라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전해본다.

1. 군산 수송동에서 익산역까지

“80년대 학생 운동, 밑에서 기획하고
실질적 플레이어는 공개지도부가 맡아"

군산에서 차타고 익산 역까지 가는 동안, 대화의 첫 물꼬는 ‘유시민‧심재철 논란’이었다. 80년대 학생운동권 얘기가 인터뷰의 주를 이루다보니, 그 무렵 한창 시끌시끌했던 양자 간 합수부진술서 공방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듯했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한 말이 있다. ‘공개지도부에 대한 이야기는 다 했지만 공개되지 않는 지도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이게 유 이사장의 주장이다. 당시 80년대 학생운동권 안에는 지하 지도부가 있었다. 민석(김민석 전 의원, 85년 서울대 총회장, 전학련 의장)이나 나 같은 사람은 공개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이 피해보지 않도록 우리 같은 이들이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가자는 거였다. 논의는 밑에서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공개 지도부인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일을 주도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예측 못한 돌발 상황도 많고.”

서울대 82학번 물리학과 4학년 당시 함운경 당시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시사오늘
서울대 82학번 물리학과 4학년 당시 함운경 당시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시사오늘


- 학생운동 문화는 어땠나.

“이념 지향적이었다. 공개된 활동을 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 시절 공부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공부했다. 그러한 사고유형, 사고패턴을 갖게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학생운동 분파 안에는 NL파도 있었고, PD파도 있었다.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다. 그 배경에는 맑스-레닌주의, 주사파(정식 명칭은 주체사상파, 민족해방 NL파로 학생운동권의 분파)가 있었다.”

- 이재오 전 의원은 학생운동이 80년대부터 이념화 되었다고 했다. 그 전에는 독재 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 등이었다고 하던데.

“이재오 선배가 원래 굉장히 전투적인 사람이다. 그분이 유명해진 게 중앙대 학생들을 끌고 나와, 한강 다리 넘어 6·3 사태(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저지선을 뚫고 나오면서부터다. 근데 훗날 이 선배가 참여한 건 남민전 민투(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였다. 물론 이 선배는 남민전 하부조직원이여서 남민전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남민전은 북한과 연계를 갖고 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 삼민투(서울대 총학생회 산하 조직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건 어떤 성향의 조직이었는지.

“삼민투는 공개된 투쟁위원회였다. 명칭도 당시 추세와 유행에 맞춰 지은 거다. 어떤 시위든 공개된 투쟁위가 주도한 것처럼 나오지만, 조직 동원 등 실제로는 (지하조직) 밑의 단위에서 하는 거다.”

박찬종 변호사의 책 <광주에서 양키까지>(이하 책)에서 ‘함운경’은 1985년 광주 5‧18 발생 5주년을 계기로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해 이를 전담할 삼민투를 결성해 위원장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박 변호사는 김영삼(YS), 김대중(DJ) 재야 정치인이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소속이었다. 책은 박 변호사가 미 문화원을 점거 농성한 학생들의 변호를 맡았을 때를 기록한 책이다.

- 그럼 어떻게 학생운동을 하게 된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본격적으로 서클 활동하고, 선배들 만나면서 했다.”

함 대표는 82년 서울대 입학 후 물리학과 과학사회연구회 등에서 서클 활동을 했다.

- 선배들 중 알만한 이들은?

“박종윤 선배라고 있다. 나중엔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간 분이다. ‘박종철 사건’이 일어난 계기가 ‘박종훈 찾아내라’고, 경찰에서 고문하다 죽게 된 거잖나. 또 다른 분 중엔 민노당(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의엽 선배가 있다. 그분들이 윗선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85년 5월 뭔가를 하자, 이런 큰 아웃라인이 있었다. 행동대원들은 4학년 학생들로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자였다. 그때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미 문화원으로 정한 건 누구냐. 그들이 정한 건 아니고 우리가 정한 거다.”

- 아이디어를 낸 건 맞나.

“내가 아이디어를 낸 건 아니다. 아이디어 낸 사람은 서울대 공대 홍성영이란 친구였다. 그 친구는 점거 농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우리를 설득했다. 각 투쟁위는 감옥 갈사람 순번을 정해놓고 있었다. 대기자들한테 제안했고 오케이해서 하게 된 거다.”

- 감옥 갈 순번도 정하다니.

“그렇다. 우리 학교 1년 위 선배들이 연대, 고대 등이 연결해 팀을 꾸렸다. 연세대 책임자는 박선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안보 담당 비서관이었다.(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그런 친구들이 노 대통령 옆에 있으니까, 미국에서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게 본 거였다. 당시 박선원은 미 문화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려대 이종훈도 있었다. 이런 친구들이 감옥 가기를 자청한 경우였다. 우리들끼리 말을 맞췄다. 수사 도중 경찰이 동료를 가리켜 ‘쟤 구속시킬래. 뭐 할래’ 라고 물으면 ‘그냥 제가 한 걸로 합시다.’ 내 경우는 그랬다.”

- 아니, 왜 그런 건가. 희생인가?

“위원장 급은 징역을 더 오래살기로 마음먹은 이들이다. 징역을 좀 더 살면 되니까.”

- 국가보안법에 걸릴 거 예상한 건가.

“예상 안했다. 국보법은 나만 해당이 된다.”

- 왜인가.

“미 문화원 사건이 점거농성 아닌가. 집시법(집시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력 등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단순 폭력으로만 하기엔 전두환 정권에서 성이 안차는 거였다. 사건을 키우려 했다. 그렇다고 전체를 국보법으로 하려니 건덕지(건더기의 방언)가 없었다. 내 집을 압수수색해서 물건이 나온 게 스탈린이 쓴 <레닌주의에 기초에 대하여> 소책자였다. 그걸 이적표 소지로 삼았다. ‘양키 고 홈’이라고 글 쓴 것도 국보법으로 몰았다.”

- 국보법 적용을 반대한 사람은 없었나.

“당시 내 사건을 맡은 분이 신광옥 검사였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 때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이런 분들이 국보법 적용을 반대한 거다. ‘국보법을 학생한테 적용하기 시작하면 이 법은 누더기가 되고 결국 종이호랑이가 된다.’ 그래서 반대한 건데, 무리하게 밀어붙인 거다.”

- 불온서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보법에 적용됐던 건가.

“그런 책자를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이적 표현물 소지죄였다. 이후부터 학생들에 대한 국보법 적용이 남발되기 시작했다. 그 뒤는 무조건 국보법이다.”

책에 따르면 “함운경은 84년 10월 스탈린이 지은 <레닌주의 기초에 대하여>에 관한 일본어 서적 복사본 1부를 1장에 20원 씩, 800원을 주고 복사해 서울대 부근 자취방에다 둔 바 있다.

87년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 정치인, 재야, 학생, 시민이 군사 정권 독재를 퇴진시키고 직선제를 이뤘다. 사진은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 책에 수록된 6월 항쟁 당시의 모습과 설명.ⓒ뉴시스
87년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 정치인, 재야, 학생, 시민이 군사 정권 독재를 퇴진시키고 직선제를 이뤘다. 사진은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 책에 수록된 6월 항쟁 당시의 모습과 설명.ⓒ뉴시스

 

2. 익산 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 오르기까지

“영화 1987, 최환 검사 막내가 황교안”
“내게 국보법 적용부터, 사문화 돼”

영화 <1987>보면 최환 검사(당시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라는 등장인물이 있다.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문해서 죽이고 이를 은폐시키려했던 정부에 맞서 사인을 부검시킨 정의로운 인물로 나온다. 역까지 걸어가던 중 6월 항쟁을 다룬 영화로 화제가 돌려졌다. 함 대표는 최 검사에 대해 얘기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사람은 최환 검사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그는 공안검사였고 미 문화원 점거 재판의 담당자였다. 수사는 안 했지만, 재판의 책임자였다. 그는 광주 얘기만 나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전두환의 전자만 나와도 제지시켰다. 나에 대한 국보법 적용에 있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국보법 적용이 마구잡이로 시작됐다. 반공법보다 더 센 게 국보법이었다.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데 길을 연 사람이 ‘최환’이었다. 그 밑의 막내가 ‘황교안’(자유한국당 대표)이다."

- 이후 어느 정도로 적용됐나.

“수천 명씩 적용됐다. 나중에는 하도 많이 걸리니 유명무실해졌다. 현실세계에서 그 법에 적용되면 무서워하고 그래야 하는데, 마구 갖다 붙이니 사문화(死文化)된 것이다.”

85년 12대 총선에서의 신민당의 돌풍은 무기력했던 민주화 진영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다시금 힘을 모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사진은 신민당을 통해 힘을 규합했던 YS와 DJ.ⓒ뉴시스
85년 12대 총선에서의 신민당의 돌풍은 무기력했던 민주화 진영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다시금 힘을 모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사진은 신민당을 통해 힘을 규합했던 YS와 DJ.ⓒ뉴시스

 

3. 서울 가는 기차 안

“기지개를 펴던 꿈틀대던 민심이
신민당 돌풍 계기로 터져 나왔다”

어수선했다. 입석이었고, 화장실 옆 기차 통로 벽면은 짐을 올려놓을 수 있는 철제 선반이 있었다. 승무원이 서서 가는 이들의 표를 점검했다. 커다란 바퀴 굴러가는 소리부터 누군가의 전화 통화, 대화 등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비좁은 통로 벽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선 우리도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우선은 미 문화원 점거 전후의 긴박했던 상황으로 돌아갔다.

-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이 일어나기까지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까. 어땠나.

"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이 있었다. 신민당 돌풍이 강하게 불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으로 숨죽였던 사람들이 조금씩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84년을 거쳐 꿈틀대던 것이 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터져 나온 거다. 시대적으로 보면 사회 저변부의 대중적 불만과 민주화 요구들이 상당히 거세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걸 폭발시킬 계기를 만들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신민당(신한민주당)은 그야말로 꿈틀대던 민의에 불을 붙이는 심폐소생술과도 같았다. 전두환의 폭압 정치가 장기화되면서 무기력해졌던 민주화 세력을 다시 규합하는 용광로가 돼줬다는 평가다. YS가 재야 정치인들을 설득해 85년 1월 창당한 신민당은 추후 DJ(김대중)까지 결합되며 태풍의 눈이 됐다. 12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을 위협하고, 관제 야당을 누르며 제1야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정 평론가는 관련해 자신의 칼럼 등에서 “직선제 개헌 카드를 내세워 승리한 신민당의 2‧12 총선 결과야말로 6‧10 항쟁이 일어날 수 있던 실질적 기폭제가 돼줬다”고 기술했다.

-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땠나.

“서울대 82학번(당시 4학년)을 흔히 ‘똥파리’라고 부른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감옥 갈 것이 뻔했지만, 자청해 희생하겠다는 학생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소위 말해 수백 명이 대기를 했다고 보면 된다. 순서대로 고르다보니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였다. 나 역시 그런 걸 불사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함운경’ 등을 중심으로 이후 기획된 미 문화원 점거 농성 계획은 5월 15일 수립됐다.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 성대 등 73명의 행동개시대원이 꾸려졌다. 5월 23일 12시를 D-DAY로 정했다. 앞서 21일 미 문화원을 현장 답사한 이들은 경비 관계 등 내부 구조를 파악했다. 또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나’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민주단체 민주인사에게 는 글 제하 ” 등의 유인물과 플라카드를 준비했다. 행동당일인 23일 오전 11시 50분경 학생들 중 일부는 근처의 금성다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12시 미 문화원을 향해 뛰어 들어가 기습 점거했다. 이는 박 변호사 책에 나온 것을 토대로 개략한 것이다.

- 근데 왜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이었나. 반미 투쟁의 일환이었나.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자체가 반미 투쟁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주목받지 못했을 뿐 전에도 반미 시위 등은 있었다. 미 문화원을 택한 것은 전략적 측면이 컸다. 상징적 효과가 크고, 점거하기 쉽다보니 그리 됐다. 특히 점거하기가 용이한 반면 독재정권이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건들 수 있는 곳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상당히 당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치적 파장으로 볼 때도 5‧18 진상규명을 분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점거 농성을 계획한 것은 84년 민정당사 점거 농성에 착안한 거였다. 서울대도 원래 참가하기로 돼 있었는데 중간에 신호 미스로 못 들어갔다.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만 들어갔다. 이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며 제안됐다. 이를 앞서 얘기한 홍성영(아이디어 낸 자)이 제안한 것이고…. 주장하는 바가 맞아 ‘아, 좋다’한 거였다.”

- 미국의 책임을 문제 제기했다.

“5‧18 때 전두환 정권이 군대 동원하고, 공수부대 빼서 투입한 것은 주한미군의 사전 승인 없이 불가능했다. 특히 전방에 있는 20사단을 뺀 것은 한국군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민추협이 변호인단으로 나섰을 때 미국 정치권에서도 학생들 편에 섰다고 하던데.

“미국 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김대중 사형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우리 파트너는 정부 밖에 없으니 전두환의 집권 과정이야 어떻든 파트너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겠고.”

- 72시간의 점거 기간도 정하고 들어간 건가.

“처음엔 그 정도 오래 있을 줄 몰랐다. 점거하자마자 바로 우리를 끌어낼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근데 그곳 자체가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하루를 넘겼고, 2박3일 72시간이 된 거다. 미국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점거농성으로 밀고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보면, 79년 이란 대사관 점거가 있었다. 인질을 잡아둔 점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인질을 잡아둔 것도 아니었다. 점거 농성을 하고 우리 주장을 한 것일 뿐이었다. 그 사람들 다 내보내고 우리 공간만 확보하면 된다고 나오니까…. 흔한 인질 테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자비하게 끌고 나오자니 자기들 스타일 구기고, 결국 대처를 못하고 우리들하고 대화를 시작한 거다.”

- 어떤 대화들이 오갔나.

“‘너희들 요구사항이 뭐냐.’ ‘우린 여기를 접수하러 왔다.’ ‘너희들 책임이 있다. 사과해라.’ ‘공수부대 투입 등 너희들이 다 승인해서 한 거 아니냐.’ …. 그들도 자기들끼리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전열을 재정비했다. ‘김민석’ 등 바깥에 있는 친구들은 이 사건을 이슈화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도 기세등등하게 쟁점화 시킬 수 있던 거고.”

- 나올 때는 어떻게? 협상이 잘 돼 나온 건가.

“스스로 나왔다. 우리도 몰랐는데 남북 회담이 있었다. 마침 대화 장소가 우리 농성 맞은편의 롯데호텔이었다. 바로 앞에서 열리는데, 그 판을 깰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충분히 알릴만큼 알렸다고 생각했다. 5‧18 광주 현장에서의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국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것으로도 목적한 바를 달성했고, 자진해서 나왔다.”

- 미 문화원 점거가 5‧18을 알리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맞다. 당연하다. 그 전에는 5‧18의 5자도 못 꺼냈다. 하지만 이후는 달랐다. 국민도 알고 세계도 알았다. 분노하는 시민들도 많아졌다. 국회에서 대정부질문 하려면 서울에서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이 왜 일어났냐. 5‧18 때문에 일어난 거 아니냐. 비로소 5‧18 질문을 할 수 있게 됐다. 언론사에서도 기사화할 수 있었다. 전만 해도 보안사에서 만든 보도지침이 있어서 내보낼 수가 없었다.”

- 그 사건을 통해 반미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맞나.

“우리의 점거로 미국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측면은 분명히 있었다. 어쩌다보니 미국이 한국에 (12‧12 전두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승인한 것뿐이다. 이 정도가 아니고, 한통속이다….”

80년대 학생운동권은 이념화됐고, 공개된 지도부는 감옥을 불사하는 등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함운경 대표는 말했다.ⓒ시사오늘
80년대 학생운동권은 이념화됐고, 공개된 지도부는 감옥을 불사하는 등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함운경 대표는 말했다.ⓒ시사오늘

 

“김민석 상대편 조로 총회장 선거 출마
학생운동파, 선거 앞두고 의기투합해”

- 85년 4월 총학생회장 선거 때 김민석 전 의원과 경쟁할 당시 이슈 선점의 일환으로 반미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런 얘기도 있던데.

“그 당시 총학생회라고 하는 건 반정부 투쟁 기관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나오겠나. 운동권 학생들만 나오는 거다. 학생회가 합법화되면서 이제 막 지하에서 공개된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한…. 그 시기 학생회장은 커다란 명예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지하조직에서) 희생하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을 세팅해서 보낸 거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조가 ‘김민석‧강영근’ 조였다. 근데 나는 뭐냐. 들러리였다. 경쟁관계가 아니고.(웃음)”

박 변호사 책에 의하면 ‘함운경’은 85년 3월 ‘분단극복의 출사표’라는 제목의 벽보를 교내 곳곳에 붙이며 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가 붙인 글에는 “통일이여, 반도의 하나됨을 위해 요긴한 쓰임을 받기 원한다. 학생회여 통일의 무기여“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또 같은 달 ”양키는 집으로 보내져야 하며“로 시작하는 선거홍보용 유인물을 만들어 민족 통일을 위한 반독재 학우 투쟁선언을 하기도 했다. 

- 아, 그런 건가.

“단독 후보로 선거를 치룰 수는 없지 않나. 창피하지만 누군가는 나서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 그 모든 게 세팅이라는 것인가? 밑에서 기획한거란 얘긴가.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웃음) 그 내부에서도 묘한 경쟁이 있었다. 김민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한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내게 와서 열심히 해보자 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미 구도 자체가 게임이 안 됐다.”

- 왜 그런가.

“뭐냐면, 서울대에서 인원이 제일 많은 곳이 공대다. 아니, 사회대 출신의 총학생회장 후보 김민석과 공대 출신의 부회장 후보 강형근 조가 나오면 누가 덤빌 수 있겠나. 반면에 우리 조는 경영대, 자연대였다. 나는 부회장 후보였다. 자연대는 공대 인원보다 반절도 안 된다. (총회장 후보인 김홍식이 속한)경영대 규모는 더 조그맣다.”

- 조직 규모 상 싸움이 안 된 것 같다.

“것과 함께 서로 이번엔 민석이로 가자고 되어 있던 거고.”

- 학생운동권 파는 단일이었나.

“약간 분열돼 있었다. 총학생회 선거 앞두고 잘 협력하자고 했다. 내가 볼 땐 별로 큰 차이는 없었다.”

- 선거 때는 각각 어느 파였나.

“MC(main curent), 내가 속한 파가 주류파였다. 그 다음은 MT, 민주화 투쟁위원회라고, 주류를 공격한 그룹이 있었다. 나는 주류 그룹, 민석이는 주류를 공격하는 파에 섞여 있었다. 무슨 커다란 노선 차이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주도권 다툼이기도 했다. 나중엔 서로 절충했고.”

- 아까 얘기 듣던 중 궁금한 건데 학생회 합법화가 언제부터 된 건가.

“직전 학기부터 총학생회가 처음 나왔으니까.”

“5‧18 진상 알리는 획기적 사건”
“직선제로의 방향 전환이 큰 계기”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이 6월 항쟁의 직간접 도화선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사건으로 5‧18 문제가 부각됐다. 학원가 시위도 확산됐다. 이를 억압하려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 박종철 고문 사건 등이 터졌다. 결국 6월 항쟁으로 연결됐다.

“그건 너무 과도한 것 해석인 것 같다. 합법적 공간이 늘어나고, 분출시키는 과정 속에서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반동이 온 거 아닌가. 군사정권에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다’ 86년도에 다시 탄압으로 돌아서고, 5‧3 인천사태도 생겼다. 건국대 경우는 거기 들어온 학생 1000명이나 구속시켰다. 이렇듯 확 눌렀는데, 다시 87년에 일어선 거니까. 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큰 건물이 있으면, 누구는 돌을 나르고, 누구는 시멘트를 발랐다. 다 자신이 지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기여한 게 맞다. 그런 의미인 것이지, 결정적 계기는 아니라는 거다.”

- 그러면 결정적 계기는 뭐였다고 생각하나.

“내가 볼 땐 86년도 말, 학생들의 방향 전환이 가장 큰,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본다.”

- 어떤 방향 전환인가.

 "요구수준을 낮춘 것. ‘직선제 개헌으로 낮추자.’ 그거였다."

- 왜 낮추게 된 건가.

“사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87년, 88년쯤 되면 혁명적인 상황이 올 거라고 봤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80년 광주처럼 총 들고 싸워서 현 정부를 힘으로 타도하자는 거였다. 무력으로라도 현 정부를 뒤집어엎자, 이거였다. 왜냐. 국민들이 지지할 거니까. 정권 탄압이 그만큼 무지막지하던 때였다. 학생들의 불신도 커져갔고,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구호도 과격해져 갔다. 그래서 혁명적 상황이 올 거라고 본 거였다. 하지만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 직선제 개헌으로 낮춘 것. 그러면서 폭발적 지지를 얻기 시작한 것. 그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생각한다.”

- 학생들 중 방향 전환을 한 주체라고 한다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든, 주사파든, 이들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전대협 1기 의장인 이인영(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그에 속한다. 이들이 가장 크게 기여한 바는 그런 방향 전환을 한 데 있다. 그 같은 핵심 지도부들이 87년 6월 항쟁의 계기를 만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정치권, 재야, 학생운동 모두) 손발이 맞는 행진이 된 거다. 또 그 힘으로 전두환을 밀어 붙여 결국 6월 항쟁까지 갔다. 중간의 계기는 박종철이 죽고, 이한열이 죽고….”

함운경 대표는 6월 항쟁 기간 감옥에 있었다. 그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85년부터 88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현재 그는 네모선장 대표이자 정치인으로 활동 중에 있다. 낡은 시대의 사상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갖고 내년 총선에 임하게 될는지 궁금하다.ⓒ시사오늘
함운경 대표는 6월 항쟁 기간 감옥에 있었다. 그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85년부터 88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현재 그는 네모선장 대표이자 정치인으로 활동 중에 있다. 낡은 시대의 사상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갖고 내년 총선에 임하게 될는지 궁금하다.ⓒ시사오늘

 

“6월 항쟁 기간 감옥에 있어”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생각”

- 그 기간에 감옥 안에 있었다. 6월 항쟁 당시, 어떻게 알고 있었나.

“원주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생활 처우 개선을 이유로 우리가 하도 시끄럽게 굴자, 교도관이 와서 TV시청할 권리를 줬다. 원래는 일주일에 한 번만 주는 건데, 진정시키려고 영화라도 봐라, 한 거였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데, 데모하는 장면이 나오더라. 그때가 87년 6월 달이었다. 직선제 개헌 투쟁을 구호로 외치며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군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 그 광경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드디어 민중 봉기가 일어나는구나, 생각했다.”

- 그 전에는 6월 항쟁에 대해 몰랐던 건가.

“잘 알지는 못했다.”

- 박종철 열사 죽음 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일이 커지고 있는 것도 알았고. 면회를 자주 오는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해주니까. 우리(시국사건 관련자들)는 모여서 살았다. 다는 아니고, 내가 있는 교도소에서는 20~30명 정도 됐다. 서로가 면회를 통해 얻은 얘기들을 해주니까.”

- 김민석 전 의원이 있던 교도소에서는 6월 항쟁 당시 탈옥도 모의하고 했다던데.

“우리는 탈옥 생각은 안 했다.(웃음) 많이들 구속 기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였다. 나나 몇 명은 좀 더 오래 살아야 했지만.”

‘함운경’은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및 본보기용 국보법으로 적용돼 85년 6월부터 88년 2월까지 교도소에 있었다.

- 아까 말한 생활처우개선은 무슨 얘기인가.

“교도소도 바깥의 상황하고 아주 밀접하다. 안의 교도소에서는 정치범들을 속된 말로 밟아버린다. 어느 때는 돼지 통구이처럼 줄로 묶어두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금 처우개선을 요구하고 싸우는 거다. 책 좀 제대로 보게 해 달라. 각자 독방 말고, 우리도 모여 살겠다, 부식이 엉망이다. 개선해라 등. 무엇으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극단적으로 싸우게 된다. 근데, 하여간 나는 단식하자는 사람이 제일 싫었다.(웃음) 지금 청와대 정무수석하는 강기정이, 그 친구는 뻑 하면 맨 날 단식하자고 했다. 고만 좀해라 죽겠다….(웃음) 단식을 하면 목숨을 거는 거 아닌가. 끝을 봐야 한다. 끝은 내가 죽든지 저쪽이 항복하든지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단식밖에 없으니까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거다.”

“군사 독재 정권 퇴진 이뤘지만
시스템 대안 제시 못한 것이 패착“

- 한국 정치 발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군사 정권을 물리친 것. 그리고 민주화하는데 목숨을 다 바치겠다. 이것을 추구했다. 또 그 밑바닥에는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바란 거 아니겠나.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꿈꾸던 사회인가, 하면 영 아닌 거다. 지금 사회를 좋게만 볼 수 있냐. 부정적인 게 참 많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회한이 든다. 왜냐면 이러려고 젊음을 바쳤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헬조선이란 말처럼 빈부격차 문제라든지, 이런 등등이 과연 우리가 꿈꿔왔던 세상인가. 그런 것들과 거리가 먼 것에 너무 안타깝다. 나이가 60 가까이 되고 힘도 빠질만하니 더 답답할 때가 된 거다.”

- 그 같은 한계를 가져온 이유로 보는 것은.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낡은 사상을 갖고 싸웠던 게 가장 문제라고 본다. 1980년대는 동서 분야 모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몰락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구시대적인 맑스 레닌이나 주체사상 등 이런 것이 현실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라고 봤다. 그리 생각하고, 저기 골방에서부터 가지고 온 거다. 그걸 무기 삼아 우리의 사고방식을 세우고 군사 정권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세상에 대해서는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냥 대세의 흐름에 묻혀버렸고, 지금은 생활인이 된 거다. 우리가 좀 더 의식이 있고, 준비를 잘했다면, 또는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것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 그럼 앞으로의 과제 역시도?

“내가 볼 땐 새로운 세대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박수쳐주고 격려해주고 해야지.”

- 현재 보면, 실질적으로 운동권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중 일부는 나라를 망치고 있지 않나. 당시의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뭐냐면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선한 의도를 갖고, 선한 제도를 만들면 세상이 그렇게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지 않더라는 거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퍼주면 세상이 좋아질 것 같지만, 세상은 절대 그런 방향으로 안 가더라, 이거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혹시 기억나나? MBC에서 이경규가 양심냉장고라는 프로를 한 적이 있었다. 옛날엔 교통신호등이 사거리 건너편에 있었다. 차들이 그 신호등을 보기 위해 정지선을 자꾸 넘어갔다. 그래서 이경규가 이 선에 멈추는 차 주인에게 양심냉장고를 줬다. 하지만 지금은 신호등이 건너편에 있지 않고 앞쪽에 있다. 신호등을 봐야 하니까, 이쪽에 있으면 절대로 정지선을 넘어갈 이유가 없다. 양심냉장고가 필요 없다. 사회제도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인위적으로 너 정지선 넘으면 벌금 때리고 뭐 할 거야. 사람들이 선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 현실의 경우 보통 이념에 경도되거나 그러면 그걸 깨기가 어렵다. 그런데 함 대표는 굉장히 담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합리적이다.

 “나도 온갖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세상을 배우면서 들었던 생각이니까….”

- 열린우리당 소속의 제4회 지방선거 출마를 제외하고는 줄곧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해 왔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쉽지 않은 정치실험이었음에도 포기 않고 시도해온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도 출마할 계획인가.

“DJ가 당선되는 대통령 선거할 때 나는 권영길후보 관악동작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관악갑도 출마했다. 그 뒤 권 선배에게 그런 말을 했다. 고향(군산)가서 하겠다. 그러면서 한 말이 있다. (군산에서)무소속으로 다섯 번 떨어지면 되지 않겠나.(웃음)”

함 대표는 15대 관악구갑 총선을 시작으로 16대, 20대 군산시 총선까지 재보선, 지선 포함하면 총 5번의 선거에 출마했다. 이중 지선을 제외하면, 모두 무소속 출마였고, 안타깝게 2위로 석패한 경우는 세 번이었다.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부의장, 한국정치발전포럼 대표, 군산미래발전연구소 소장, 노무현 재단 기획위원 및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맑은 정치인이었다. 보태지도, 빼지도, 치장하지도 않은 말 하나하나가 담백하고, 담대했고, 솔직했고 정직했고, 초연했다. 합리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을 꿈꿨다는 서울대 물리학도라던, 그를 칭한 박 변호사 책의 어느 대목처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군산부터 용산 행까지 함 대표와 함께 한 시간 동안 든 생각이었다. 용산역 대합실 안. 헤어질 시간이었다. 여의치 않아 못 찍었던 카메라 셔터를 서둘러 눌렀다. 오랜만에 보는 동지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는 그의 분주한 걸음을 뒤로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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