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자택] 노무현과 정몽준 운명 바꿔 놓은 그 곳
[정몽준 자택] 노무현과 정몽준 운명 바꿔 놓은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7.2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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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지지 철회 鄭 찾아갔지만 문전박대…盧 대통령 당선, 鄭 내리막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에 성공했던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노무현재단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에 성공했던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노무현재단

제16대 대선을 하루 앞둔 2002년 12월 18일 밤.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 자택 앞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저녁 갑작스레 지지 철회를 선언한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노무현이 직접 발걸음을 한 것.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고, 노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 장면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다. 노무현이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민주당 지지자들은 투표장으로 모여들었다. 무당파층 가운데는 노무현이 ‘안쓰러워’ 표를 던진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2002 월드컵 바람에 힘입어 일약 유력 대권후보로 뛰어 올랐던 정몽준은 이때를 기점으로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분기점이 됐던 이 사건의 시작점으로 시계를 돌려 보자.

이회창에 뒤진 노무현…정몽준과 단일화 수용

2002년 4월. 8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제16대 대선에 나설 거대 양당의 후보가 확정됐다. 한나라당에서는 예상대로 ‘대세론’을 형성했던 이회창 후보가 손쉽게 대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반대로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노풍(盧風)’을 탄 노무현 후보가 ‘대세’였던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이로써 제16대 대선의 초반 구도는 ‘강자’ 이회창 대 ‘다크호스’ 노무현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일대일 구도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이회창과 노무현의 지지율 차이는 점점 벌어져갔다. 국민참여경선이 흥행하면서 한때 이회창에 10%포인트 이상 앞섰던 노무현의 지지율은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더니, 6월 13일 펼쳐진 제3회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그야말로 폭락(暴落)하며 이회창에게 10% 이상 밀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월드컵 성공으로 국민적 지지를 획득한 정몽준이 9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민주당 내에서는 공공연히 ‘후보 교체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무현의 후보 사퇴를 종용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이에 민주당 의원 37명은 10월 4일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결성하고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후단협 결성 이후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후단협 37명 중 17명은 아예 탈당을 선언했고, 일부 전국구 의원들은 출당을 요청했다. 한쪽에서는 노무현에게 후보 사퇴를 촉구하면서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세운 후보를 자신들의 손으로 몰아내려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당이 핵분열을 일으키고 반창비노(反昌非盧) 신당 출현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대선정국의 이합집산이 가속화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는 다음주중 20여 명이 1차 탈당,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세 규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김민석 전의원과 신낙균 상임고문은 17일 정몽준 의원의 통합21에 합류했다. 당이 와해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노무현 후보측의 선대위와 한화갑 대표는 정국운영방식과 정치현안을 놓고 상호비난전을 펼치며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 또 김근태 의원을 비롯한 ‘선노무현 지원, 후단일화’를 주장하는 의원들도 점차 후보단일화 압력을 가하는 쪽으로 이동, 당내 상황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후략)
2002년 10월 17일자 <국민일보> ‘민주 핵분열…이합집산 가속화’

당 안팎의 압력에 시달린 노무현은 결국 11월 단일화를 수용했다. 그리고 후보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리서치앤리서치> 기준 46.8% 대 42.2%로 정몽준을 꺾고 민주당과 국민통합21 양당의 단일 후보로 우뚝 선다. 이때가 11월 24일, 제16대 대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양당 단일후보로 확정됐다.
민주당 신계륜, 국민통합21 민창기 후보단일화협상단장은 24일 자정께 서울 라마드 르네상스 호텔에서 이날 실시된 후보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사가 조사한 여론조사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로 노무현 후보가 4.6% 포인트 앞섰다. 또 하나의 여론조사기관인 월드리서치사가 조사한 결과는 노 후보 38.8%, 정 후보 37.0%로 노 후보가 1.8% 포인트 앞섰다. 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결과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양당이 합의한 무효기준 30.4%보다 낮아 무효처리됐다.
이에 따라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를 1대0으로 이겨 민주당과 국민통합21 단일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2002년 11월 25일자 <매일경제> ‘노무현 단일후보 확정’

정몽준의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은 정몽준 자택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시사오늘
정몽준의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은 정몽준 자택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시사오늘

정몽준의 지지 철회…극과 극으로 갈린 두 사람의 운명

두 사람의 단일화는 대선 구도를 흔들어 놨다. 단일화 직후 노무현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에게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정책 조율 문제로 선거 지원에 소극적이던 정몽준도 대선 일주일 전 선거·정책·국정운영 공조에 합의한 뒤 공동 유세에 돌입, 노무현에게 힘을 실었다.

하지만 노무현에게는 마지막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18일, 서울 명동 합동유세에 나섰던 정몽준이 유세 직후 돌연 노무현에 대한 지지 철회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정몽준 측은 노무현이 유세 현장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문제 삼았으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언론들은 서울 유세에서 정몽준 지지자들의 “차기 대통령 정몽준”이라는 외침에 노무현이 “속도위반 하지 마라. 우리 당에는 정동영과 추미애도 있다”고 말한 것이 지지 철회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겠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국민통합 21 정몽준(鄭夢準) 대표가 18일 밤 노무현(盧武鉉) 후보와의 공조 파기를 전격 선언한 것은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당초 합의됐던 ‘공동 정부 정신’이 지켜질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 대표는 이날 공조파기의 이유로 표면상 노 후보가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돌발 발언을 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으나 당직자들은 노 후보가 집권 이후 정 대표를 ‘여러 후보군 중의 하나’로 격하시키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성토하고 있다.
노 후보의 이날 종로 제일은행 본점 앞 발언을 통해 정 대표를 민주당 추미애(秋美愛) 최고위원, 정동영(鄭東泳) 상임고문과 동격으로 격하시킴으로써 후보단일화의 암묵적 합의라고 할수 있는 ‘차기 지위 보장’ 문제를 일거에 묵살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략)
2002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 ‘정몽준, 노무현 지지 철회…결별선언 배경은’

이 소식을 들은 노무현은 정몽준 자택으로 달려가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이인원 당무조정실장이 나와 “정 대표가 술을 많이 드시고 주무시고 있다. 결례인 것은 알지만 지금 만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에 노무현은 기자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이날 밤 평창동 정몽준 자택 앞에서 벌어진 이 일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꿔 놨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자유한국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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