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개혁] 숨 가빴던 93년…하나회 청산,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문민정부 개혁] 숨 가빴던 93년…하나회 청산,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8.08 0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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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93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스물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3년 문민정부의 세 가지 개혁 정책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스물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3년 문민정부의 세 가지 개혁 정책이다.ⓒ시사오늘 김유종

대통령 집권 1년차를 ‘허니문’이라 한다. 국민들이 기대감을 갖고, 국정 운영에 힘을 실어주는 달콤한 시기기 때문이다. 대통령들은 지지를 등에 업고 일반적으로 취임 후 1년 이내에 개혁에 착수한다.

그중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숨 가쁘게 취임 1년차 개혁 레이스를 달렸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탄생하던 그 해에만 △하나회 청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등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국민들도 취임 직후 71%의 지지율에서, 6~11월 사이에는 83%로 상승, 유지해 오랜 시간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임기가 5년으로 정해진 대통령은 흔히 ‘2년차 징크스’에 빠지곤 했고, 그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개혁 정책을) 더 늦추면 결국 임기 후반기에 다른 큰 일을 하기 어렵고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다”며, 1년차에 개혁 정책을 서둘러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은 군 내 사조직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또 고위공직자라면 국민들에게 재산을 공개하고, 금융거래는 본인 명의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다. 그 ‘당연함’, 상식이 제도화된 시기가 바로 1993년이다.

“사실 모든 종류의 개혁에는 반드시 저항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금융실명제와 같은 개혁은 성격상 그 성과가 점진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반면, 개혁에 따른 불이익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즉, 기득권 세력에게 주는 피해는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지만, 국민 대다수에게는 장기간에 걸쳐 간접적으로 잠재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75쪽.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과 정치적 감(感),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준 국민적 지지까지. 두 가지가 맞물려 문민정부의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꿈꿨던 ‘국민 대다수에게 장기간에 걸쳐 간접적으로 잠재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3년 문민정부의 세 가지 개혁 정책이다.

 

1993.03.03.~08. 하나회 청산


YS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인 군부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냈다ⓒ김영삼 민주센터
YS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인 군부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냈다ⓒ김영삼 민주센터

김영삼이 부처 업무 보고의 첫 순서로 지목한 곳은 국방부였다. 1993년 3월 3일, 그는 청와대 회의실에 군 수뇌부를 처음 만났다. 이후 3월 8일, 취임 11일 만에 하나회 숙청을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 김영삼은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했다. 대신 비(非) 하나회 출신 김동진 연합사부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김도윤 기무사참모장을 기무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했다. 이 모든 건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김영삼의 의중을 알게 된 지 불과 4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영삼은 권영해를 재촉해 신임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급히 임명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군의 핵심 요직에 하나회 출신의 힘을 빼는 데 성공했다. 김영삼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두 사람 임명 후 부대로 돌아가 취임식을 가지라고 했다.

길게는 5‧16 이후 32년, 짧게는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10년간 유지돼오던 육군의 골격을 뒤집는 혁명적 인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권 장관에게 얘기를 꺼낸 지 불과 4시간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진 이날 군 인사는 신임 총장과 물러나는 총장이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우리 군 내부에 엄존하는 현실적인 쿠데타 위협 세력이었던 ‘하나회’ 척결의 막이 올랐다.

-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92쪽.

김충립 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은 2016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YS는 군을 잘 모르니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나회 파워를 모르니까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회고록을 통해 “군에 대해서 사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첫 개혁 정책, 하나회 청산은 지난 군사정권 동안 기울인 관심 하에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나는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오랫동안 국방분과위원으로 있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군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갖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나는 이미 군의 숙정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92~93쪽.

김영삼은 초대 국방장관으로 권영해 장관을 임명했던 것 역시 그가 세운 군 개혁 구상 중 일부라고 밝혔다. 하나회 중심의 군 개혁과 군의 동요 없이 국방을 맡을 인물을 권영해로 본 것이다. 권영해 역시 비 하나회 출신이다.

김충립 전 보안반장의 “사전에 (하나회 척결 계획이) 알려졌다면 쿠데타가 났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나회 출신 인사에게 직접 들었다”는 말처럼, 김영삼 역시 개혁 방법을 고민해왔다. 그는 개혁의 시기와 방법이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라고 판단했다.

내 주변에서는 질풍노도와 같은 군부 숙정에 대해 크게 염려했지만, 나는 군 개혁이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전격적으로 단행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모든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며, 특히 군대 내에서 특수한 사조직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하나회의 경우, 언제라도 세력을 규합해 저항해올 개연성이 높았다. 따라서 그들이 세력을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숙정을 단행하는 길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94~95쪽.

약 한 달 뒤, 4월 2일에는 강성(强性) 하나회 출신인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을 해임하고, 비 하나회 출신인 도일규 한‧미연합사 부참모장과 장창규 육본 동원참모부장을 각각 승진 및 임명했다. 8일에는 김연각 제2야야전군사령관과 구창회 제3야전군사령관이 교체됐으며, 마지막으로 15일에는 하나회 출신 장군들까지 몰아냈다. 이로써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 청산이 완료됐다.

아래는 김대중과 김종필의 회고록에 명시된 하나회 숙청에 대한 평가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 실명제 실시, 정치관계법 개정 등 잇단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군부의 정치 세력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국민들은 “문민의 정부라서 역시 다르다”며 이를 반겼다. 취임 초기 김 대통령의 인기는 가파르게 치솟았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46쪽.

사람들은 허를 찌르고 급소를 치는 YS식 전격성과 대담성을 경험했다. (중략) 한국에서 위험한 군내 사조직을 거뜬히 없애버린 것은 김영삼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이런 일은 YS 같은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면 해내기 어렵다고 본다. YS는 상황 판단이 집중‧단선적이다. 권력의 본성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하나회 청산은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꼭대기 전두환‧노태우를 정리해야만 완성된다는 판단이 그런 유의 것이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88~193쪽.

 

1993.02.27.~05.20.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김영삼은 첫 국무회의 날 재산 공개에 앞장서며, 깨끗한 정부를 꿈꾸는 문민개혁의 출발을 알렸다.ⓒ김영삼 민주센터
김영삼은 첫 국무회의 날 재산 공개에 앞장서며, 깨끗한 정부를 꿈꾸는 문민개혁의 출발을 알렸다.ⓒ김영삼 민주센터

2월 27일, 김영삼은 첫 국무회의 날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만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재산 공개를 선언했다. 이날 본인부터 재산 공개에 앞장서며, 깨끗한 정부를 꿈꾸는 문민개혁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문제는 당내 인사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재산 공개로 정계 개편이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는 ‘유전(有錢)난감 무전(無錢)안도’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윗물 맑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의 큰 기대를 불러온 재산 공개는, 논란 끝에 김빠진 듯 보였다. 실제로 민정‧공화계를 중심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관계자는 “각료 전원의 재산 내역 공개는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며 개혁의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또 하나의 실망, 재산공개(한겨례, 1993.03.11.)’라며 실망감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달래며 개혁은 해야한다(매일경제, 1993.03.17.)’며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3월 18일 장관급 29명과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11명 등 총 40명의 고위공직자 재산이 일괄 공개됐으며, 22일에는 민자당의 김종필 당대표 등 소속 의원 161명의 재산을 공개했다.

그러나 공개된 부동산이 시가에 한참 못 미치는 공시지가‧기준시가를 사용해 과소평가됐다고 비판받았다. 뿐만 아니라 타이핑, 자필 등 작성 방법도 통일되지 않았으며, 재산의 범위도 각인각색이란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라며 “도덕성 회복하는 의식 전환에 있어서는 5공 청문회보다 몇 백 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평가했다.

재산 공개는 부정부패의 척결뿐 아니라 부동산 투기 억제에도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또 공직자는 국가에 봉사한다는 생각만 가져야지 명예와 부를 함께 가지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10쪽.

재산 공개에 따른 파문이 일단락됐을 무렵, 김영삼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바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다. 김영삼은 이를 문민정부 개혁법안 1호라고 칭했다. 개정안은 이후 5월 20일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때 만들어진 법안을 바탕으로, 현재 국가 및 지자체 정무직, 4급 이상 공무원은 재산등록 대상이며, 1급 이상 공무원 등은 재산공개 대상자가 됐다.

재산공개제도는 무엇보다도 ‘깨끗한 공직자상(像)’과 ‘깨끗한 정부’의 기틀 마련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제도의 진정한 의미는 ‘깨끗한 정부’ 구현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후속 개혁운동에 기폭제를 마련하는 데 있었다. 그 동안 재산공개제도는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그때마다 좌절되었다. 당시의 사회가 정경유착을 통한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였고, 부패의 사슬을 끊고 깨끗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지도층의 과감한 개혁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재산공개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깨끗한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우리 정치문화가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11~112쪽.

 

1993.06.22.~08.12. 금융실명제


YS는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김영삼 민주센터
YS는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김영삼 민주센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김영삼은 ‘금융실명제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면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모든 은행, 증권, 보험 등의 모든 예‧적금 통장과 주식, 자기앞수표, 이자의 지급과 상환 등은 반드시 실명으로 하게 됐다.

구체적으로 △비실명으로 거래한 기존의 금융자산 소유자는 이날부터 2개월 이내에(10월 12일) 실명으로 전환 △가명에서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연령에 따라 최고 5천만 원까지 자금 출처 조사 면제 △2개월 경과 기간 지난 후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기간에 따라 시행일로부터 매 1년간 10%씩, 최고 60%까지 과징금 부과 등의 내용이 명령권에 담겼다.

금융실명제는 김영삼의 대선 공약 중 하나로,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금융실명제의 시작을 알아보려면, 두 달 전 6월 22일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 당시 김영삼의 지시로 비밀리에 실명제 실무 작업팀을 구성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양수길 박사 등이 투입돼 이들은 열흘 만에 실명제 초안을 마련했다.

이를 골격으로 한 세부적인 법률적 작업은 재무부에서 맡았다. 7월 12일 김영삼은 홍재형 재무부장관과 청와대에서 만나 실시 방침을 전했다. 국세청, 법제처 직원과 은행 직원 등 약 20명의 재무부팀은 과천 주공아파트 한 채를 두 달 간 빌려 활동했다. 실무진으로 선발된 이들은 40일간의 출장 명령이란 명목으로, 실제로 공항에 나가 일본까지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비밀 작업 장소에 모였다.

그렇게 한 달여 시간이 지나 8월 9일, 김영삼은 이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실무자를 제외하고는 김영삼, 이경식 부총리, 홍재형 장관, 황길수 법제처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박관용 비서실장은 <시사저널>이 남긴 회고록을 통해 “얼굴을 보자마자 ‘실명제 실시합니다. 극비리에 추진해야 하므로 팀을 만들어 착수했어요’라고 했다”며 “비서실장도 모르는 추진팀이라니 당혹스러웠지만 더 물을 수도 없었다”고 후술했다.

특별담화 발표에 앞서 오후 7시, 김영삼은 청와대에서 긴급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해 긴급명령권 발동을 심의‧의결했다. 실명제의 제2단계인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 과세는 국세청의 전산망이 완성되는 대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리라는 예상은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또 전격적으로 실행에 들어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정부에서도 극소수의 관계자만이 알았다. 일의 성격상 절대 보안을 요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날 나의 실명제 단행은 ‘목요일 저녁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65~166쪽.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금융실명제 실시 후 두 달 사이 가명계좌의 97.4%가 실명계좌로 전환돼 실명 금융거래 관행을 정착시켰다. 뿐만 아니라 12일 금융실명제 실시일은 공직자윤리법 개정에 따라 공직자 2만 5천여 명의 재산 등록이 마감된 다음날이었다. 이에 재산 등록에서 제외시킨 재산을 비실명 금융자산으로 은폐, 은닉한 공직자들이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는 새 정부의 개혁 정책이 2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일부에서는 사정‧개혁과 경제를 대립시키며 우선 순위 논쟁을 하기도 했으나, 이날 나의 선언은 약간의 견해 차이를 단숨에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단계로 개혁을 도약시킨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67쪽.

김영삼이 2~3년 뒤에나 실시하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 세 가지가 있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실명제를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사정과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기왕의 정치개혁 작업이 물거품이 되기 쉽다는 점 △시행 후 후유증 치유에만 1년 가량 소요될 것인데 더 늦추면 임기 후반기에 다른 큰 일을 하기 어렵다는 점 △통상적 입법 절차를 밟아서는 제대로 된 실명제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대통령 긴급 명령을 해야 하는데, 회기 중엔 발동이 어려우니 9월 정기국회 이전에 가능한 시기는 8월밖에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국회의 공개적 토론 과정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으며, 음성적 정치자금 수수에 익숙한 국회의원들 역시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실명제 추진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그 동안 직접 헌법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헌법을 외우다시피 연구한 끝에 헌법 제76조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조항을 찾아내고 이에 의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결심했다. 긴급명령은 법률과 똑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이었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어떠한 예외도 절대 배제한다는 것도 원칙이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69쪽.

한편 역대 대통령의 금융실명제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김대중의 경우 “취임 초기 김 대통령의 인기는 가파르게 치솟았다”고만 짧게 명시한 뒤, “집권 2년째인 1994년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며 비판했다.

김종필은 증언록을 통해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이후 5공 청산 특별법 등을 언급하며, “전광석화의 척결은 YS식 결단이 아니면 불가능했다고 나는 평가했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현실적인 한계와 압도적인 반대론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보류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실명제가 법률로서 통과된 사례는 본인이 처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일은(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그동안 명분과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여건 미비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던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할 이유와 필요성은 진작부터 제기돼왔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조달을 위해 국내저축을 늘릴 필요성 때문에 예금주의 비밀을 보장해줄 수 있도록 가차명 또는 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가 그때까지 허용되어왔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금융거래 규모도 커지면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중략) 당초 추진하던 대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는 하되 그 실시 시기를 정하지 않음으로써 금융실명제의 시행을 보류시키기로 한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 부칙에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한다”는 단서조항을 넣는 것으로 매듭을 짓게 되었다. 결국 명분과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실명제는 현실적인 한계와 압도적인 반대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보류되고 말았다. 대통령인 내가 재가했고, 국회에서 법률로서 통과된 정책이 무산된 사례는 그것이 처음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156~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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