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돌아오면 미래 없다…이재명 선택은? [옛날신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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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돌아오면 미래 없다…이재명 선택은? [옛날신문보기]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2.05.05 10: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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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재수 성공한 DJ·문재인, 2년 넘게 잠행…바로 돌아온 정동영·홍준표, 본선 진출조차 못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역대 대선에서 패한 후보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계에 복귀했을까. ⓒ시사오늘 김유종
역대 대선에서 패한 후보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계에 복귀했을까. ⓒ시사오늘 김유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상임고문의 ‘조기 등판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고문이 6·1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하고, 8월 전당대회에 나서 당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선이 끝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다시 선거에 나서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다. 당내에서도 이 고문 복귀를 두고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역대 대선에서 패한 후보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계에 복귀했을까. 대선 패배 직후 정계를 은퇴했다가 몇 년 후에야 복귀한 후보들도 있었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당대표에 출마한 후보도 있었을 정도로 천차만별이었다. <시사오늘>은 당시 언론의 목소리를 빌려 패배한 대선 후보들의 행보를 되돌아봤다.

 

정계 떠났던 DJ, 2년 7개월 만에 복귀


1992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DJ는 2년 7개월 후 정계로 돌아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통령기록관
1992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DJ는 2년 7개월 후 정계로 돌아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통령기록관

1992년 12월 19일. 김대중(DJ) 당시 민주당 후보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DJ는 1971년 제7대 대선과 1987년 제13대 대선에 이어 세 번째 대선에 나섰지만, 김영삼(YS)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패하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떨궜다. 결국 ‘대권 3수’ 도전마저 실패한 그는 영원히 정치권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19일 대선 결과에 승복하고 의원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후보는 이날 오전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을 나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한다”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고 밝혔다. (후략)
1992년 12월 20일 <한겨레> 김대중 씨 정계은퇴

그러나 정말로 DJ가 대권 꿈을 포기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은퇴를 선언한지 1년도 되지 않아 곳곳에서 복귀설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DJ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미 정치를 떠났다”고 일축했지만, 그가 돌아온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1995년 제1회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DJ가 한 강연에서 ‘지역등권론’을 주창하며 정치권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이 최근 순회강연을 통해 주창한 ‘지역등권주의’를 놓고 민자당이 이를 비난하고 나서는 등 예민한 선거쟁점으로 부각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 이사장은 지난 주말 여수 강연회에서 지방선거가 끝나면 “특정 지역이 국정의 혜택과 권리를 독점하는 지역패권주의시대가 가고 모든 지역이 같이 대접받고 협력하는 수평적 등권주의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략)
1995년 5월 30일 <경향신문> DJ ‘지역등권론’ 공방 가열

지역등권론으로 분위기를 띄운 DJ는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주당 후보들을 위해 지원유세를 펼쳤고, 현직 대통령이었던 YS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기도 했다. 그 결과 여당이었던 민자당은 15개 광역자치단체장 중 겨우 5곳을 가져가는 데 그치는 ‘참패’를 당했고, 자연스럽게 DJ의 입지는 강화됐다.

DJ의 지원을 받았던 민주당의 선전은 곧 DJ의 ‘복귀 승인’으로 간주됐다. 그렇게 DJ는 잠시 동안의 ‘여행’을 끝내고 평생 자신이 몸담았던 정계로의 복귀를 신고했다. 1992년 12월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만의 일이었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3일 정계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김 이사장은 이날 오전 자신의 계보모임인 내외문제연구회 이사회에 참석해 “비록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일시적으로 받더라도 민족의 운명이 기로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정계 복귀를 밝혔다.
그는 “이번 정치 재개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됐다”며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정계 은퇴 선언 번복에 대해 “92년 12월 19일 정계 은퇴 당시 정치를 다시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현재의 국정현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고 제1야당의 정당기능이 마비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고 정치재개 이유를 설명했다. (후략)
1995년 7월 14일자 <한겨레> 김대중 씨 정계 복귀 선언

 

8개월 만에 돌아온 1997년의 이회창


1997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은 8개월 만에 복귀해 당권 장악에 나섰다. ⓒ연합뉴스
1997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은 8개월 만에 복귀해 당권 장악에 나섰다. ⓒ연합뉴스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DJ와 다른 길을 걸었다. 패색이 짙어진 1997년 12월 19일 새벽. 이회창은 오전 3시께 패배에 깨끗이 승복하고 차기 정부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겠다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던 DJ와 달리, 이회창은 한나라당 명예총재로 남아 국내에서 복귀 타이밍을 모색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19일 새벽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오전 3시께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김대중 당선자의 국정운영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이날 대국민성명을 통해 “당선의 영광을 안은 김대중 후보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경의를 보낸다”면서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며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말했다. (후략)
1997년 12월 19일 <매일경제> “결과 승복…국정 협조” 이회창 후보 대국민성명

이회창은 1998년 제2회 지방선거를 자신을 부각시킬 ‘적기’로 판단했다. 제2회 지방선거는 DJ 정부 임기 초반에 열린 ‘허니문 선거’였으므로 야당이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지방선거가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당 체제 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이회창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조금씩 존재감을 부각해갔다.

한나라당 이회창 명예총재가 6·4 지방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섰다. 그는 11, 12일 충북과 경북도지부 필승결의대회에 잇따라 참석, 정부여당의 실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중략)
일견 김 대통령이 95년 6·27 지방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한 것을 연상시키는 그의 ‘지방선거 행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이 당 주변의 분석이다.
우선 지방선거 직후 총재경선을 통한 지도부 교체론이 비등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선거 국면을 활용, 명분과 세를 미리 쌓는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새 정부 초기 국정운영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점도 그의 복귀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후략)
1998년 5월 13일 <동아일보> 이회창 씨 본격 정치활동 나섰다

실제로 6·4 지방선거는 여당의 승리로 끝났고, 한나라당에서는 지도체제 개편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이회창은 8·31 전당대회에 도전장을 던져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대권 재수’의 발판을 마련했다. 8개월여 만의 정치 일선 복귀였다.

한나라당이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씨를 새 총재로 선출했다. 한나라당은 작년 말 대통령선거 이후의 과도체제를 마감하고 비로소 본격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 총재는 대선 패배를 딛고 8개월여 만에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재집권 실패에 따라 방향을 잃고 표류해온 한나라당에도, 실패의 장본인이었던 이 총재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후략)
1998년 9월 1일 <동아일보>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5년 만에 전격 복귀한 2002년 패배 후 이회창


2002년 대선에서마저 패한 이회창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2007년에 돌아와 세 번째 대선에 도전했다. ⓒ연합뉴스
2002년 대선에서마저 패한 이회창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2007년에 돌아와 세 번째 대선에 도전했다. ⓒ연합뉴스

반면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은 패배 후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4년여간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20일 “이제 정치를 떠나고자 한다. 깨끗이 물러나겠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후보는 이날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고, 국민께서 내리신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어 “노무현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면서 “부디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 대통령이 되어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후략)
2002년 12월 20일 <한국경제> 이회창 정계은퇴 선언…“국민선택 겸허히 수용”

그러다가 제17대 대선을 1년여 앞둔 2006년 말, 4년 만에 당 공식 행사에 참여하면서 복귀설을 불러일으켰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행보가 한나라당 대권구도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는 5일 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나라포럼’ 초청 특강에 참석했다. 이 전 총재가 당 공식행사에 참여한 것은 지난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4년 만이다. 이 자리에는 맹형규·이재오·공성진 의원과 양정규 전 의원 등 그의 총재 시절 측근 10여 명이 참석했다.
최근 정계 복귀설이 나돌고 있는 이 전 총재는 이날도 현 정권 실정을 강력히 비판하는 한편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후략)
2006년 12월 5일 <서울경제> 이회창, 4년 만에 당 공식행사 참석

하지만 여러 추측 속에서도 이회창은 복귀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념이나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경제 살리기만 주장하면 된다는 발상은 전형적 인기영합주의”라고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직격하면서도 “현실정치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회창이 이명박 대선 후보 선대위 상임고문직을 고사하면서 직접 대선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설이 떠돌았지만,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10월 19일까지도 대선 출마설을 일축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자신을 두고 나오고 있는 대선 출마설에 대해 “지금까지 입장과 전혀 변함이 없다”며 출마할 뜻이 없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이 전 총재는 19일 오후 국가디자인연구소 개원 1주년 기념 세미나(한국세계지역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기조연설을 마친 뒤 나오는 길에 이 같이 말했다.
2007년 10월 19일 <오마이뉴스> 이회창, 대선 출마설에 “지금까지와 변함없다”

그러나 이회창이 대선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10월 23일에는 이회창 지지자들이 출마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10월 24일에는 이회창이 직접 보수단체 집회에 참석해 장외 연설을 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그가 사실상 ‘복귀 수순’에 들어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대선 41일을 앞둔 2007년 11월 7일. 결국 이회창은 전격적인 정계 복귀를 선언하면서 제17대 대선에 출마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지 4년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7일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며 한나라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 전 총재는 이날 서울 남대문로 단암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한나라당 후보가 정권교체를 향한 국민의 열망에 부응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한나라당 경선 과정과 그 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런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전 총재의 출마는 지난 2002년 12월20일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지 4년 11개월여 만의 정계복귀이자 세 번째 대권도전이다. 투표를 41일 앞둔 올해 대선구도는 이로써 이명박·정동영·이회창 후보의 3파전 양상으로 재편됐다. (후략)
2007년 11월 7일 서울경제 이회창 “정권교체 이명박으론 안 된다”

 

패배 3개월 만에 총선 출마 선언한 정동영


정동영은 2007년 대선에서 참패했으나, 곧바로 정계로 돌아와 총선에 나섰다. ⓒ연합뉴스
정동영은 2007년 대선에서 참패했으나, 곧바로 정계로 돌아와 총선에 나섰다. ⓒ연합뉴스

48.67% 대 26.14%.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입장에서 제17대 대선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회창의 출마로 보수가 분열됐음에도 역대 대선 중 가장 큰 표 차(22.53%포인트)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정동영은 패배를 인정하고 ‘백의종군 하겠다’며 2선 후퇴 의사를 밝혔다.

17대 대선에서 패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21일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 전 장관은 이날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가진 대통합민주신당 최고위원-상임고문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당 진로와 관련해 원로와 중진 선배들께서 알아서 잘 지도해달라. 저는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뒤에서 돕겠다”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정 전 장관은 당분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당 안팎에서 나왔었지만 직접 자신의 거취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후략)
2007년 12월 21일 <한국경제> 정동영 “백의종군 하겠다”

그러나 정동영의 복귀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았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동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는 ‘동정론’도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내에서는 친노(親盧) 책임론이 불거졌다.

대통합민주신당 내에서 대선 참패에 따른 ‘노무현 정부 책임론’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친노(친노무현)그룹’ 2선 후퇴론까지 불거지는 등 친노·비노그룹 간 갈등도 재연될 조짐이다. (중략)
이 와중에 당내에서는 친노 2선 후퇴론 등이 대두되면서 논란이 번지고 있다.
비노그룹 쪽은 “이번 패배는 노 대통령에 대한 한풀이다. 하나님을 갖다 놨어도 패했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과 그 일당이 책임져야 한다”는 등 친노그룹의 자숙과 2선 후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친노진영은 직접적 대응을 삼가면서도 “포퓰리즘식 책임 떠넘기기”라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후략)
2007년 12월 21일 <세계일보> “盧 대통령 失政 때문에 대선 참패”…책임론 불거져

게다가 정동영의 ‘대권 경쟁자’인 손학규가 대표로 선출되자, 정동영의 발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동영은 ‘총선 승리를 위한 중진의 희생’을 명분으로 서울 동작을 출마를 선언, 대선 패배 후 석 달 만에 정치 전면에 복귀했다.

지난해 말 통합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12일 오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 동작을 출마를 발표한다.
정 전 장관측은 이날 “손학규 대표가 오전 기자회견 직전 정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종로에 출마해 서울 ‘북부벨트’를 맡을 테니 ‘남부벨트’를 담당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당에서도 서울 동작을 출마를 요청해 수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008년 3월 12일 <연합뉴스> 정동영, 서울 동작을 출마키로

 

2년 2개월 만에 당대표 당선된 문재인


2012년 대선에서 패한 문재인이 다시 당권을 장악하는 데는 2년 2개월이 걸렸다. ⓒ연합뉴스
2012년 대선에서 패한 문재인이 다시 당권을 장악하는 데는 2년 2개월이 걸렸다. ⓒ연합뉴스

2012년 12월 19일. 치열했던 제18대 대선의 결과가 발표됐다. 승자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패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다. 문재인은 역대 대선 후보 중 유일하게 득표율 50%를 넘긴 박근혜에 맞서 선전(48.02%)했지만, 책임론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문재인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과거 대선에서 패배한 주자들과 달리 계속해서 의정 활동을 수행했다.

(전략) 당장엔 문 전 후보와 그가 중심에 있는 친노(친노무현) 진영이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비노(비노무현) 등 비주류 진영은 20일 여의도 모처에서 회동해 대선 패배 책임론을 제기하며 전면적인 당 쇄신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문 전 후보의 국회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격앙된 목소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상 정계 은퇴 압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친노 주류가 지휘권을 행사한 지난 4·11 총선에 이어 친노 얼굴을 내세운 대선에서도 연거푸 패배하면서 그동안 잠복했던 친노 패권주의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특히 범야권이 총력 지원하며 야권 승리의 기대감이 높았던 대선에서 사실상 ‘완패’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다는 점에서 문 전 후보가 정치적 활로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단일화 협상 국면에서 이해찬 전 대표 등 당 지도부 총사퇴로 문 전 후보가 당의 전권을 위임받아 대표권한 대행을 겸임하고 있지만 리더십 공간마저 극히 협소해진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문 전 후보가 ‘현실 정치 참여’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숙제로 받아들였던 만큼 대선 패배를 자신의 한계로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고민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2012년 12월 21일 <서울신문> 文, 2선 후퇴 관측 속 ‘의원 사퇴’ 압박 직면

그러나 당내에서 문재인의 입지는 좁아져갔다. 대선 9일 후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비주류 박기춘 의원이 선출됐고, 2013년 5월 4일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비주류 대표격인 김한길 의원이 당대표가 됐다. 2014년 3월에는 민주당이 새정치연합과 합당,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수립됐다. 친노 세력과 문재인은 조금씩 설자리를 잃어갔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 중앙위원장이 6·4 지방선거 전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기로 선언하면서 지방선거를 비롯한 정치권 전반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김한길 대표와 안철수 위원장은 2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6·4 지방선거 전 신당을 창당한다고 밝혔다. 앞서 양측 회동의 매개체가 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여부 역시 무(無)공천을 공동으로 실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14년 3월 2일 <파이낸셜뉴스> [제3지대 신당 창당] 민주-안철수, 신당 창당 선언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완패하며 ‘문재인 역할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재인도 7·30 재보궐선거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영오 씨와 함께 단식투쟁을 벌이고, 9월 출범한 비상대책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몰락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차기 대표를 노리는 물밑 경쟁이 시작됐다. 임기 2년의 차기 당 대표는 2016년 4월 총선의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차기 대권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계파 간 무한투쟁이 예상된다.
우선 친노무현계 문재인 의원의 당권 도전설이 나온다. 당이 위기상황임을 감안해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선두권을 다투는 문 의원이 전면에 나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다. (후략)
2014년 8월 2일자 <서울신문> [7·30 재보선 후폭풍] 새정치연 차기 당권주자 벌써 ‘꿈틀’

그리고 2014년 11월. 차기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한 문재인은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로 당선되면서 당권을 거머쥐었다.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 패한 지 2년 2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당권을 거머쥠에 따라 대권 재수를 선언한 그의 행보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 대표가 지난 18대 대선 패배의 책임에서 제기된 당권·대권 분리 공세를 이겨내고 대권 조기 검증대인 당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당내 대권주자들과 격차를 벌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15년 2월 8일 <서울경제> [새정치연합 새 대표 문재인] 탄력받는 대권 재수 행보

 

대선 직후 당권 도전 선언한 홍준표


홍준표는 제19대 대선에서 패한지 41일만에 당대표로 당선됐다. ⓒ연합뉴스
홍준표는 제19대 대선에서 패한지 41일만에 당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2017년 제19대 대선은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해보나 마나 한’ 승부였다. 탄핵으로 인해 보수는 사실상 궤멸된 상태였고, 상대인 더불어민주당에는 문재인이라는 강력한 후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여론조사 역시 민주당의 승리, 한국당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략) 조선일보가 지난 1~2일 칸타퍼블릭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서는 문 후보가 38.5%로 1위를 기록했고, 홍 후보가 16.8%로 안 후보(15.7%)를 제쳤다.
특히 지난 조사(4월 7~8일)와 비교하면 홍 후보는 7.2%에서 두 배가 넘는 9.6%p 상승했다. 반면 안 후보는 37.5%에서 무려 21.8%p가 빠졌다. 문 후보는 2.8%p 상승했다.
2일 실시된 서울신문·YTN-엠브레인 조사에서도 홍 후보(19.6%)가 안 후보(17.8%)에게 앞섰다. 문 후보는 40.6%로 선두자리를 지켰다.
한겨레와 동아일보 조사에서는 홍·안 후보 지지율 합계가 문 후보에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안 후보는 홍 후보에게 턱밑추격을 허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지난 1~2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문 후보 39.7%, 안 후보 18.9%, 홍 후보 13.7% 순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실시된 동아일보-리서치앤리서치 조사에서도 문 후보 40.2%, 안 후보 19.9%, 홍 후보 17.7% 순이었다.
서울경제신문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2일 실시한 조사에선 문 후보가 38.0%로 부동의 1위를 유지했다. 안 후보(21.0%)와 홍 후보(16.8%)가 뒤를 이었다. (후략)
2017년 5월 4일 <데일리안>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보수표심’ 대이동 중

이러다 보니 대선 참패에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향한 책임론은 크지 않았다. 당내에서는 홍준표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홍준표 본인도 대선 패배를 공식 인정하며 “한국당을 복원한 것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24.0%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2위로 낙선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큰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지만, 완전히 무너진 지지기반을 회복한 기여도를 감안해 대선 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당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철우 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10일 선대위를 해산하는 회의에서 “당초 우리는 후보를 못 낼 정도로 어려웠고, 후보 배출한 뒤에도 양강 구도에서 우리는 군소 후보로 전락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홍 후보가 가진 독특한 기질로 보수가 막판에 결집했다”며 홍 후보의 기여를 인정했다. (후략)
2017년 5월 10일 <한겨레> 홍준표 “세상이 날 부를 때 기다리겠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홍준표는 5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귀국하면 신보수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당을 새롭게 하겠다”면서 차기 당권 도전 의사를 내비쳤다.

대선 패배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 중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선 후보는 14일 “귀국하면 신(新)보수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당을 새롭게 하겠다”고 밝혔다. 출국 이틀 만에 ‘LA 구상’을 밝히면서 당권 도전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후략)
2017년 5월 15일 <동아일보> 홍준표 “新보수주의로 당 새롭게 하겠다”

6월 18일에는 “대한민국 보수 우파를 재건하고 혁신하겠다”면서 당대표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제19대 대선이 치러진 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가 18일 “대한민국 보수 우파를 재건하고 혁신하겠다”며 자유한국당 당 대표 후보로 공식 출마했다. 홍 전 지사는 이날 “친박 패당 정부에서 주사파 패당 정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면서 문재인 정부와 친박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홍 전 지사는 이날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출마 선언문을 통해 “보수는 비겁했고 무책임했다. 한 줌도 안 되는 기득권에 숨어 자기 살 궁리만 했다”면서 “처절하게 반성하고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후략)
2017년 6월 18일 <서울경제> 돌아온 저격수 홍준표 “文정부는 주사파 패당에 불과”

 

대선 패배 후보의 ‘복귀 공식’


이재명은 DJ·문재인의 길을 걸을까 정동영·홍준표의 길을 걸을까. ⓒ연합뉴스
이재명은 DJ·문재인의 길을 걸을까 정동영·홍준표의 길을 걸을까. ⓒ연합뉴스

두 차례 대선에 출마해 모두 패배했던 이회창을 제외하면, 나머지 네 명에게서는 하나의 패턴이 발견된다. 복귀를 서두르면 ‘대권 재수’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1992년 DJ는 대선 패배 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2년 7개월만에 돌아왔다. 문재인도 다시 당권을 잡기까지는 2년 2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대권을 잡았다.

반면 대선 4개월 뒤에 있었던 총선에 직접 출마했던 2007년 정동영이나 곧바로 당권 장악에 나섰던 2017년의 홍준표는 자당(自黨)의 후보조차 되지 못했다.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가졌던 DJ, 문재인과 달리 정치적 파괴력이 약하거나(정동영) 당내 세력이 미약했던(홍준표) 이들은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이른 복귀가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재명은 어떨까. 이재명이 대선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안희정 전 충남지사, 김경수 전 경남지사, 조국 전 법무부장관 등 ‘정통 친문(親文) 후보’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이재명이 ‘대권 재수’에 성공하려면 당권 장악을 통해 친명(親明)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충고가 나오는 이유다. DJ·문재인보다는 정동영·홍준표에 가까운 셈이다.

더욱이 이재명은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배우자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과 같은 ‘사법리스크’를 지고 있다. 검경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르면 6월 재보궐선거, 늦어도 8월 전당대회에는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역대 최다 득표 낙선자’ 이재명은 과연 언제쯤 돌아올까. 그리고 그는 ‘이른 등판은 필패’라는 징크스를 깰 수 있을까.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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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022-05-05 16:12:25
얘비집 비싸게 팔고 녹취에도 대장동 진짜범인 윤석열과 사기꾼가족 쥴리와 장모범죄외
고발사주와 검언유착 한똥훈 모든 범죄사실에 연결된 휴대폰 내역 숨기고있어도 무혐의등
검사가 연결된 범죄는 편파수사로 무혐의 만든 개검찰로
검사출신 별장성추행 김학의 권성동 원희룡 박영수 곽상도 안기부출신 파견검사 권영세등
이러한 검찰의 만행을 막기위해 미국도 수사는 FBI.CIA 독립된 수사대가 하고 검사는 기소만한다
3.31
MBC 특종
'유시민 비리를 안불면,이것저것 수사해 팔순까지 깜빵에 썩게 만들겠다'
한동훈과 유착된 채널A 이동재의 수감자 협박

4.1~2
윤석열―한동훈:통화 29회
한동훈―손준성―권순정:카톡방 75회

4.3
적반하장으로
뇌물죄를 뒤집어쓰고 매장 당할뻔한 유시민과
이를 세상에 폭로한 MBC 기자들과 제보자X를
고발하라고
고발자 이름만 빈칸으로 남겨놓고,친절하게 내용을 다 작성해서 보낸
손준성의 고발사주 고발장 ▶김웅한테 전달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