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최양부 “YS ‘버르장머리’ 발언에 일본이 자금 지원 안했다고?…IMF 때문에 못한 것”
[時代散策] 최양부 “YS ‘버르장머리’ 발언에 일본이 자금 지원 안했다고?…IMF 때문에 못한 것”
  • 글=최양부 전 청와대 농림해양수석비서관/ 정리=김병묵 기자
  • 승인 2019.07.1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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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라운드 협상단 조찬서 비밀면접으로 농림수산수석 발탁”
“3당 합당, 전국정당·보수대통합·군정종식위한 유일했던 방법”
“IMF 환란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임창열 거짓말로 촉발”
“TK 보수세력, YS 세력 몰아내고 이회창 내세워 박근혜 끌어냈다 ”
“일본문제는 치밀한 준비·논리로 풀어가야…감정적 대응 무의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최양부 전 청와대 농림수산수석비서관/정리=김병묵 기자)

나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다. 하지만 4년 간 문민정부의 전무후무한 최장수 수석으로 지내며 개혁과 환란의 중심에 서 있게 됐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몇 편의 기록을 남겼고, 이를 묶어 지난 2017년 한 권의 책을 냈다.

지난 6월 20일 열린 상도동계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그 책을 읽었다는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시대의 증인'으로서 이 시대를 향한 조언을 부탁해왔다. 조언이라고 하기엔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도움이 된다면 몇 마디 보태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지난 9일 강동의 한 커피숍에서 격동의 과거, 그리고 지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문민정부에 대해 세간에선 잘못알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일까, YS와 문민정부는 그 의미와 노력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어떤 정치 지도자도 완벽한 이는 없으며, 칠공삼과(七功三過)가 있다. 공적이 7개, 과실이 3개인 셈인데, YS와 문민정부는 7개의 공보다 3개의 과만이 지적받았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우루과이 라운드

내가 정치의 핵심에 발을 딛게 되고, YS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루과이 라운드(UR)로 거슬러 올라간다. UR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전신인 관세와 무역 일반협정(GATT)이 추진한 제7차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GATT 회원국간 관세를 인하하는 등 무역장벽을 없애온 협정을, '농산물'까지 확대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 중 하나였다. 그 이전까지는 공산품이 중심이었다. 농산물도 규범이 있었는데 공산품처럼 규정을 따르진 않았었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에서 GATT 가입을 추진했었고, 결국 농산물 시장 개방을 피할 수 없게 됐었다. 나는 이 UR 협상 초기부터 타결까지 일괄협상에 관여했다. 1993년 12월 15일 UR이 7년 만에 타결됐고, 나는 3일 뒤인 12월 18일 청와대에서열린 'UR 협상 정부대표단 보고 조찬모임'에 초대받았다. 나는 이날 YS를 처음 만났다.

YS는 이날 조찬 환담 중 내게 UR 타결 이후의 농정방안에 대해 물었다. 내 대답을 들은 YS는 "좋은의견이다"라고 답했고, 나는 그날 오후에 청와대농업수산수석 비서관으로 내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중에 이경재 청와대 공보수석에게 듣기로는 그 조찬자리는 내 청와대 수석 비밀면접이었다고 했다. 

우리 다른 제품들의 수출을 위해서도, 세계적 흐름에서도 농산물 시장은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 한국 농업계엔 세계 주요국가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농민, 시민단체가 천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개방에 일단 반대를 했다. YS도 쌀시장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혹스러워졌고, 그래서 농정(農政) 수습을 위해 YS는 농림수산 수석비서관 자리를 만들어 나를 부르게 된 거다. 나는 그때부터 4년2개월을 청와대에 머물렀다. 중간에 장관으로 나가야 한다는 권유와 의견도 많았다. YS는 나와 이각범, 박세일 세 사람을 지목하면서 "이 셋은 나와 임기를 함께 한다"고 청와대를 나가는 것을 말렸다. 그만큼 나는 YS와 신뢰를 주고받았는데, 농어촌특별세(농특세) 신설 당시가 기억에 남는다.

농특세는 UR 타결 이후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세금인데, 세금 신설이다보니 찬반 양론이 치열했다. 정서적으로는 반대가 워낙 심해 YS도 고민하며 내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세금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국민의 성금이라고 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산업화 과정에서 그 주역을 키워낸 사람들은 전부 농민이다. '소 팔아서' 자식 대학 보내고 공부 시켜서 나라를 일으킨 그들이, UR 타결로 어려워졌으니 이제 그 빚을 갚는다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YS가 "그렇구만,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하더니 농특세를 도입했고, 1994년 7월 1일 부과가 시작됐다.

그 외에도 4년 간의 청와대 생활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는 자리였다. YS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와대 수석들을 밖에서 모아서 포도주도 마시며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무래도 쉬는 자리다 보니 다들 지금 당장의 국정보다는 과거 민주화 투쟁의 추억, 대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많이 언급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YS를 만나기 전 있었던 사실들은, 모두 YS와 그의 오랜 측근들인 홍인길 수석 등이 직접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수 년간 그들의 증언을 듣다보니 그동안 세간에 알려져 있던 것들과 다른 사실이 너무 많아 놀랐었다.

그래서일까, YS와 문민정부는 그 의미와 노력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어떤 정치 지도자도 완벽한 이는 없으며, 칠공삼과(七功三過)가 있다. 공적이 7개, 과실이 3개인 셈인데, YS와 문민정부는 7개의 공보다 3개의 과만이 지적받았다.

YS의 3과로 보통 1987년 대선 후보단일화 실패, 1990년 3당합당,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환란이 꼽힌다. 그래서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의 내막부터 1990년 삼당합당의 진짜 배경, 내가 직접 청와대에서 겪었던 IMF 환란의 진실까지 바로잡을 곳이 많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4자 필승론'이야말로 단일화 실패의 주범이며, 향후 한국의 정치 프레임을 바꿔버린 사건이다. 그 전까지 있었던 민주화 대 반민주 구도를 지역패권주의를 넣으면서 지역간 구도로 바꿔버렸다. 이 새로운 프레임에 모두가 걸려들어가 버렸고, 민주세력은 대 참패를 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7년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의 내막

1987년, 민주화세력에서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단일화 실패로 민주세력은 분열했다. YS에게 이 분열의 책임론을 뒤집어 씌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일화를 거부한 것은 DJ와 그 세력이다. 나는 광주일고를 나온 호남 사람이고, 당연히 DJ에 대한 애정도 있다. 그러나 진실 앞에서, DJ를 분열의 희생자로 왜곡하면서 YS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통일민주당의 분위기는 YS에게 기울어 있었다. 대권후보로 일단 YS를 내보내고, 그 다음 기회에 DJ가 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었다. 이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가리지 않고 민주당 내에 전반적으로 확산되던 공기로, 전통적인 야당생활을 해오면서 민주화 투쟁을 했던 정치인들이 대체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DJ에게 결집된 세력은 시민단체와 학생운동권이 많았다. 이념적인 색채가 진한 인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비판적 지지'라는 명분을 내걸고 DJ를 지지하면서 단일화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결국 그래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가신들이 민주당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YS와 DJ를 방에 몰아넣은뒤 문을 잠가버렸다. 단일화가 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끝장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밤 12시가 돼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DJ에게 동교동계 가신 한 사람이 쪽지를 줬다. 내용을 물으니 함석헌 옹이 위중해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DJ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못가게 할 수 없어서 DJ를 보내줬는데, 이를 수상쩍게 여긴 상도동계 가신 누군가 서울대 병원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그랬더니 함석헌 옹이 입원한 일이 없다는거다. 상도동계는 허탈해했고, 'DJ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그때 나왔다. 이게 10월 20일에 있었던 일인데, 불과 열흘 후인 29일에 DJ는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왜 DJ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단일화를 거부했을까. 그 배경에는 '4자 필승론'이라는 정치공학이 있다. 노태우가 대구경북(TK), YS가 부산경남(PK), 김종필이 충청을 나눠가지고 나면 자신에겐 호남과 수도권이 있어서 결국 대선에 승리한다는 논리가 바로 '4자 필승론'이다.

이 '4자 필승론'이야말로 단일화 실패의 주범이며, 향후 한국의 정치 프레임을 바꿔버린 사건이다. 그 전까지 있었던 민주화 대 반민주 구도를 지역패권주의를 넣으면서 지역간 구도로 바꿔버렸다. 이 새로운 프레임에 모두가 걸려들어 버렸고, 민주세력은 대 참패를 했다.

DJ가 이런 명백한 실책에도 비난을 크게 받지 않았던 것은, 지지층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YS의 지지층엔 불행히도 논리와 여론전에 강한 학자나 젊은 운동권층이 많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이 점잖은 개혁보수 지지층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종의 선전전에서 YS가 밀려난 셈이다.

1990년 3당합당의 진짜 배경

4자 필승론 이후, YS는 DJ와 결별했지만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람을 보냈다. 대통령도 군부세력에 넘겼는데 국회도 다시 민정계에게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 YS는 총선 단일화를 제안했다. YS가 어떻게든 군부세력이 국회의 다수당이 되는 것만은 막자고 하자, DJ는 단일화에 응했다. 다만 조건을 내걸었다. DJ는 중대선거구제인 당시 선거구를 소선거구제로 바꾸자는 주장을 내놨다. 호남에서 별다른 경쟁자가 없는 DJ와 달리, 영남에서 여당과 경쟁해야하는 YS에겐 불리한 제안이었다. 참모들이 "이건 DJ의 술수다. 이걸 받으면 DJ에게 밀린다"고 간언했지만 YS는 '한 번만 더 믿어보자'고 했다. 당시 YS가  DJ와 편지를 주고받는데 심부름을 하던 이들이 나와 청와대에 같이 있었던 박세일·이각범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97년의 IMF 환란이야말로 내가 바로 곁에서 목격했고 함께 겪었던 일들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환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차용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내가 현장에서 겪었던 모든 이야기와 고뇌들과는 너무 차이가 컸다. '이건 안되겠다'싶어서 국가미래연구원에서 집필 의뢰가 왔을 때, 8회에 걸쳐서 환란의진실에 대해 썼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러나 DJ는 소선거구제를 받은 후 단일화 약속은 저버렸고, YS가 결정적으로 '더 이상 DJ와는 정치를 할 수 없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참모진의 우려대로 소선거구제 하에서 노태우는 다시 여당이됐고, DJ는 호남과 수도권, 좌파진보세력 등을 엮어서 2당이 됐다. YS의 통일민주당은 3당으로 밀려나며 부산경남의 작은 지역당이 돼 버렸다.

그런 와중에 사회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1986년 김영환이 강철서신을 발표하고, 재야학생운동권이 친북성향으로 물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세력을 팽창시킨 전대협은 DJ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큰일났다'고 생각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극단적인 좌파진보세력을 견제할 방안으로 YS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코너에 몰려있던 YS에겐, 3당 합당이 지역패권주의의 구도를 깨고 전국정당화, 보수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군정종식을 이루기 위해선 대권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야합이라고 하는 이들은 일부러 합당 이후의 상황을 외면했거나 그와 관련해 무지한 이들이다. 박철언이 YS를 소위 '물 먹이는' 작업을 펼쳐나갔고 YS는 1992년 대선후보 자리를 따 내기까지 시쳇말로 '피 터지는' 싸움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기어이 잡아낸 셈이다. 그런데도 마치 3당합당을 통해 자동으로 YS가 민주자유당의 대권후보가 됐고, 그렇기 때문이 이것이 대권욕을 위한 야합이라는 비난을 하는 이들에게 이런 치열했던 과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다.

YS가 당내 경선서 이기고 대선마저 승리하며 판세가 뒤바뀌어 버렸다. DJ는 역으로 호남에 고립돼 버렸고, 그러자 수도권의 진보세력도 DJ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결국 DJ는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러나 DJ의 공작정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1995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나타나 '지역등권론'을 주장하며 지역구도를 다시 살려냈다. 지방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JP였지만 DJ도 지역구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1997년 IMF 환란의 진실

앞의 내용 중 일부는 YS와 다른 상도동계 가신들에게 들은 증언이 상당부분 포함돼 있다면, 1997년의 IMF 환란이야말로 내가 바로 곁에서 목격했고 함께 겪었던 일들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환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차용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내가 현장에서 겪었던 모든 이야기와 고뇌들과는 너무 차이가 컸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국가미래연구원에서 집필 의뢰가 왔을 때, 8회에 걸쳐서 환란의 진실에 대해 썼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 그 환란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만이라도 잠깐 논할 필요가 있다. IMF 환란의책임은 크게 몇 명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YS다. 당시 정치인들은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고, YS가 말한 것처럼 대통령이 가장 큰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환란에 큰책임이 있는 인물은 다름아닌 DJ다. 대선에 IMF환란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더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된 원인도 거슬러올라가면 DJ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다. YS의 잘못은 임창열을 부총리에 임명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임창열은 이후 국민의정부에서 경기도지사를 지낸 DJ 사람이다. 또 하나의 책임자는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고, 그 외엔 기업인들이다.

내가 직접 보고 느꼈던 바로는 IMF 환란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IMF의 미셸 깡드쉬 총재와 강경식 부총리의 비밀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YS의 지시를 받은 강 부총리는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깡드쉬를 만나 300억 불 규모의 IMF 지원과 시장안정에 필요한 충분한 자금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협상결과는 11월 18일 금융개혁법 국회 처리가 끝나는대로 외환위기극복종합대책과 함께 11월 19일 발표하는 것으로 정했고, 깡드쉬는 한국정부가 발표하는 대로 지원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YS는 17일 오전에 보고를 받았고 이제 금융개혁법 국회처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록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지만, 이제 일시적 외환위기는 수습되고 환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청와대 인사들은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외줄을 끊어버린 것이 임창열이다. YS의 치명적 인사실수이자, IMF 환란의 책임을 YS가 안게 된 이유기도 하다. 인사 타이밍의 실패였다. 외환위기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경제팀을 교체하는데, 11월 19일자로 임창열을 경제부총리로 임명한다. 국회에선 이회창과 DJ가 강하게 반발하며 금융개혁법을 무산시켰다. 그러던 와중 19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임창열이 "IMF에 가지 않는다"는 발언을 한다. 비밀협상을 통해 성사됐던 IMF와의 합의가 파기됐고 미국, 일본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YS는 TV 화면으로 이를 지켜보다가 사투리로 "저놈아가 왜 저러노!"라고 소리쳤다. YS는 '내 입으로 IMF에 가야하니 제대로 관리하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하지만 임창열은 IMF에 가는 줄도 몰랐고, 보고받은 바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후 임창열은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하고, 경기도지사까지 지냈다. 결국엔 비리로 구속되는 등 여러 문제로 인해, YS에게 모든 환란의 책임을 전가한 채 DJ와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내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해 개헌선이 확보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연방제 국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하고, 또 북한과의 연방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국회 구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정치적 충격이다. 문제는 여기 대한민국 국민들이 따라갈 것인가다. 국민들이 따라가지 않는 길로 가는 정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혁명, 혹은 전쟁 뿐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진정한 보수는 어디에

YS가 그렇게 세 가지 과실로 인해 무너지고, 그 뒤를 이은 진정한 보수가 나타나지 못했다. YS의 개혁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세력인 TK의 구보수는 이회창을 후보로 당선시키며 아바타로 만들어 YS세력들을 모두 몰아냈다. 우연인지, 혹은 그 전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오랫동안 잡아왔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하나회 숙청, 율곡사업 감사, 공직자 재산등록 등 YS의 개혁에 일차적으로 걸려든 것은 TK 세력이었다. YS와 가까웠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마저 공직자 재산등록을 하다보니 숨겨둔 돈들이 드러났고, 이는 YS의 의도까진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정치판을 떠났지 않나. 그래서 이회창을 앞세운 TK 세력이 YS세력을 몰아내고, 마지막에 한 일이 대구에 가서 박근혜를 찾아가 정계에 입문시킨 일이다. 이회창은 여기서 역할이 끝났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그들의 영화였던 박정희 시대를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YS의 개혁적 보수, 진보적이고 합리적 보수의 노선을 견지해가지 못했다. 그 세력은 오히려 손학규나 DJ쪽으로 넘어가고, 혹은 소수로 밀렸다.

이명박(MB) 전 대통령도 그런 측면에서 정치이념적으로는 무능했다. 개혁적 보수를 이어가지 못하고 박근혜에게 넘겨줬고, YS와의 연결을 거부하며 YS지우기가 시작됐다. 결국 지금은 보수정치의 흑역사 시기다. 대한민국 보수정치가 박근혜 탄핵과 함께 흑역사의 시대로 돌입했다.

이는 YS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진정한 보수의 뿌리를 잊은 반동이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뿌리를 찾는다면서 이승만, 박정희, YS를 당사에 걸어놓는 일이 벌어졌다. 세 사람을 걸었으면 정치적, 논리적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박정희는 철저하게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이고, YS는 철저하게 박정희를 비판했던 사람이다. 그 세 사람이 한 당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설명이 안 된다. 뒤죽박죽인데다, 지금의 행보처럼 거의 수구집단으로 전락했다면 한국당은 해산하는 것이 차라리 보수에 도움이 됐을 거라고 본다.

반면 그러는 사이 진보진영은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 의미하는 것은 진보 연대만으로도 정권을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간 진보세력은 '우리가 급진적인 좌파는 아니다'라는 의미로 합리적 보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DJ는 아예 DJP연대를 했고,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있었다. 2012년 문재인은 안철수와 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수의 극우화와 궤멸로 '진진연대'로도 집권이 가능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대로는 보수의 존재감이 사라진다. 보수의 견제 없는 진보정권은 폭주할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다. 개혁보수세력이 일어나야 한다.

시대를 바라보며

왜 지금이 대한민국에 심각한 위기인가를 고민해보면, 이는 헌법의 문제와 연결된다. 우리 역사는 기본적으로 건국이래 5개의 가치를 헌법에 담아왔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의회민주주의, 세계평화주의다. 헌법이 고쳐져왔고 자유가 억압된 잘못된 역사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왔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갈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시대적 소명은 1987년 체제의 정치적 모순을 드러낸 박근혜 정부를 보며, 이를 극복하고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개혁 대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만 쳐다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길로 가려고 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를 비롯한 자신들 외의 모든 세력을 적폐고, 개혁대상인데 오래된 적(북한)과는 함께 정치를 하려고 한다. 이는 순서도 아니고, 이치도 아니며, 실패했을 때 돌아오는 위험이 너무 크다. 그래서 불안하고 안타깝다.

최근 가장 큰 이슈인 대일관계 문제도 그렇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동맹인 한미일 동맹대신, 갑작스런 친중정책을 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분위기는 박근혜정부 때 부터다. 박 전 대통령은 대체 왜 중국의 전승기념일 사열에 참여했는가.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내우외환, 국란을 자초한 감이 있다.

일본을 외교적으로 관찰해보면, 합리적인 논리를 제시하면 대체적으로 인정 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일외교는 오히려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치밀한 준비와 정교한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이는 내가 직접 청와대에서 겪고, 일본에서 1년 정도 일을 해본 결과 느낀 바다.

YS가 '일본 버르장머리' 발언을 해서 대일관계가 나빠졌고, DJ가 한일관계를 잘 풀었다는 말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왜곡된 이야기가 많다. IMF 때 일본은 자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지원할 수가 없었다. IMF로 일원화돼 있는 상태에서, YS가 클린턴 대통령, 후지모리 수상과 APEC에서 만났지만 당시에선 창구가 IMF라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었다. 결국 깡드쉬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었던 건데, 그걸 앞서 말한 것처럼 임창열이 망친 것이다.

문민정부 때 한일관계 마찰은 주로 한일어업협정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이며, 또한 독도 문제가 있었다. 1996년 해양수산부가 만들어지고 내가 독도와 관련된 총책임자를 맡게 됐다. 그 때 내가 YS에게 '지금처럼 독도를 국민들과 유리된 절해의 고도로 만들어 놓으면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독도에 배가 닿을 수 있는 접안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청와대 외교수석은 물론 아무도 모르고 나와 YS 둘이서 진행한 일이었다. 마지막에 접안시설이 완공되고서야 대한민국 동쪽 땅끝 표지석 휘호를 YS에게 써달라고 했었다.

이 정도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고, 어떤 자료도 없이 감성적으로 일본의 문제에 대응해선 무의미하게 소리만 지르는 꼴이다.

국민들이 따라가는 길

내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해 개헌선이 확보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연방제 국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하고, 또 북한과의 연방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국회 구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정치적 충격이다. 문제는 여기 대한민국 국민들이 따라갈 것인가다. 국민들이 따라가지 않는 길로 가는 정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혁명, 혹은 전쟁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개혁보수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인류의 가장 천부적 가치인 자유를 억누르는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 최대의 문제는,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미명하에 자유를 누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민주를 지키는 나라로 만들 수 있도록, 그런 시대가 되도록 많은 생각을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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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2019-07-19 18:56:54
YS입장으로 바라보는 글이네요.
그런데 시사로 알고 있던 1990년대 나라사정이 역사가 되어 다시 읽게 되니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