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6 일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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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유성환 “분단된 나라, 통일이 국시여야”
故 유성환 전 국회의원
“민주산악회 시작은 대구경북 경민산악회”
“국시발언 왜곡으로 빨갱이로 몰려 낙선”
“정치권, 지역주의과제 극복할 시간 됐다”
2018년 07월 27일 17:50:18 글=유성환/ 정리=윤종희 기자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 유성환/ 정리 윤종희 기자 김병묵 기자)

여름 대구의 날씨보다 더 뜨겁게 살아온 원로 정치인 유성환 전 국회의원이 7월 24일 별세했다. 그가 떠나는 길은 정당과 계파를 떠나, 옛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대구 전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보내온 화환으로 가득했다.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지만 한 때는 어느 곳 못지않은 민주화 운동 열기가 있던 야도(野都)였다. 유 전 의원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 핵심 멤버로, 서슬 퍼런 시대에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마침내 찾아온 민주주의 시대에 대구시민들이 어깨를 펼 수 있도록 해준 이들 중 하나다. 또한 유 전 의원은 누구보다 먼저 국회에서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옥고를 치렀던 ‘통일국시’사건의 주인공이다. 이 사건으로 고인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으나, 결국 자신의 정치는 험난해지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다. 본지는 유 전 의원과 생전에 나눴던 인터뷰들을 다시 정리해 <시대산책>으로 재구성했다.

   
▲ 유성환 전 국회의원이 24일 별세했다. 그가 떠나는 길은 정당과 계파를 떠나, 옛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대구 전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보내온 화환으로 가득했다. 영정 왼쪽에는 고인이 주장했던 '통일국시', 오른쪽에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좌우명 '대도무문' 휘호가 있다. ⓒ시사오늘

나라를 위함에 보상은 필요없다

광복 직후는 혼란의 시대였다. 1947년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경북 성주경찰서 수사계에 연행됐다. 성주 장터 일대에 삐라를 뿌렸다는 누명을 썼던 거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데 법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대질신문 등 가장 기초적인 절차도 없이, 바로 엄지손가락에 쇠고리를 걸고 전기고문을 받았다. 나는 ‘나중에 공부로 성공해야 하는데 이러다 뇌가 파괴되겠다’싶어서 “작대기로 때려주이소”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이 사건은 진범이  ‘유성환이 했다’고 허위자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  ˝나중에 보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다. 내가 민주화 운동 보상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독재와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지 보상이나 변상은 이와 상관없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러다 6·25가 터진 뒤 초급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학생결사대에 들어가서 국군을 돕고, 지역이 수복된 뒤에는 의용학생전투대에 들어가서 국군들에게 총알을 얻어가며 전투를 했다.

기자가 ‘국가로부터 고초만 당했는데 어떻게 총을 들고 나설 수 있었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국가와 내 고장의 안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독립투사들도 그렇지 않나. 나중에 보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다. 내가 민주화 운동 보상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독재와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지 보상이나 변상은 이와 상관없다.

유혹은 많았다. 1967년 박정희 정권 시절엔 군수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이 왔다.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 몸이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아내가 직접 ‘마이신’을 사다 주사를 놔 줬던 때다. 제안을 받은 날 밤 잠을 한 숨도 못잤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새벽2시쯤 한숨을 쉬는데 옆에서도 한숨소리가 났다. 내가 “아직도 안 자나”하고 물으니 “지금 잠이 옵니꺼”라고 하더라.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장 배고픔은 면하고 약은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 달성 목욕탕에서 비슷한 제안을 받은 이철승계 강철호와 만나서 의논했다. 그래도 우리는 정치인으로서 군사독재에 항거해야 하고, YS와 이철승에 대한 각각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민주산악회의 ‘힌트’ 경민산악회

1980년 전두환 정권은 헌법을 개정해서 신한민주당을 해체시키려고 했다. 당시 부위원장이던 나는 이승호·김인갑·곽천순과 함께 산악회를 결성하는 비밀결사에 착수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왜 산악회냐고 물어보곤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산악회를 만들려면 회장도 필요하고, 고문·부회장·총무·연락부장 등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러면 그게 신민당 같은 정치결사체와 다른게 뭐냐’고 했었다.

창립대회를 10월 27일로 정하고 팔공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가보니 나 혼자 뿐이었다. 다른 회원들은 기관요원들의 방해로 실패했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움직임을 와해시키려고 기업체 고위직을 제안하며 회유하기도 했다. 11월 27일에도 재차 실패하고, 결국 12월 16일 한 식당에서 12명이 모여 ‘경북민주산악회’를 만들었다. ‘민주’라는 명칭을 쓰면 잡아가니 ‘경민’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듬해 3월 내가 회장에 취임한 뒤, 4월에 가택연금이 해제된 YS를 5월 1일 초청해서 함께 파계사 산행을 했다. 150명의 경찰이 산악회 행사장을 포위하고 감시했다. 내가 “오늘부터 민주회복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팔공산, 덕유산, 태백산 등 전국의 산을 두루 산행하자”고 인사했다. 그러자 YS는 동지들을 격려한 뒤 “서울에서도 전국 규모의 산악회를 결성해야 겠다”라고 답했다. 그 다음에 YS가 서울로 올라가 만든 게 민주산악회다.

민주산악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도동계의 첫 산행은 1980년 6월이지만 본격적 산악회 조직은 1981년으로, 이후에 경민산악회도 여기 동참하게 됐다.

민주산악회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역사가 해야 한다. 다만 굳이 한 가지를 자신 있게 꼽자면 군정종식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거다.

통일, 그것은 한민족의 꿈

민족이 분단됐으면 합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통일이라는 건 우리들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있는 꿈이다. 그런데 군부세력들은 독재정권의 연장을 위해,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 국시를 반공으로 규정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1986년 10월 14일 제131회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 둘째 날, 난 통일국시 발언을 하고 구속됐다. 그 첫 문단은 다음과 같았다.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 반공을 국시로 해두고 올림픽 때 동구 공산권이 참가하겠습니까? 나는 반공정책은 오히려 더 발전시켜야 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통일국시에 대한 생각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마음에 담게 됐다. 박정희 정권에서 ‘혁명공약 1호’로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국회에 들어가면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1986년 10월 14일 제131회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 둘째 날, 난 통일국시 발언을 하고 구속됐다. 이틀 뒤인 16일 여당이 체포동의안을 단독으로 불법 처리했다. 국회부의장 최영철이 민정당 소속 의원들만 따로 모아놓고, 경호권을 발동한 상태로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결국 회기 중에 구속된 최초의 현역 의원이 됐다. 17일 새벽 2시 반에 자택에서 구속돼서 가는데 나를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해서 빨간 포승줄로 묶더라. 다른 사람들은 파란 포승줄이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는 3심제가 원칙이다. 법원에서 빨갱이라고 결정내리기 전엔 맘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법무부 교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허가를 받더니, 포승줄은 파란색으로 하고 가슴에 붙이는 번호만 빨간색으로 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럼 국가보안법위반이라고 잡혀온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교도관이 ‘의원님 그것만은…’이라고 오히려 부탁을 해왔다.

당시 나를 조사했던 이 모 검사가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발언이 아니었냐’고 추궁했다. 몰아가기였다. 당연하게도, 나를 비롯한 당시 민주화 운동을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23일간 조사를 받으면서 검사에게 내가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공단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한 달에 얼마 받고 일하는지 아는가. 이 사람들이 먼 훗날 국가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지 않겠느냐”라고 오히려 반문했었다.

   
▲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 반공을 국시로 해두고 올림픽 때 동구 공산권이 참가하겠습니까? 나는 반공정책은 오히려 더 발전시켜야 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소신과 맞바꾼 정치적 치명상

1991년 11월에야 항소심 법원은 공소사실이 국회의원 면책특권 범위 내라고 하면서 공소기각 판결했다.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무죄가 됐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YS에게도 ‘국회가 직선제 이슈로 흘러가고 있는데 왜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왔느냐’고 주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원내에 들어오면 통일·민족 문제만큼은 꼭 말하고 싶었다. 국시발언 이후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구속되지 않는다고 알려주면서 또다시 회유했다. 나는 “구속·불구속의 문제가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 내 관과 함께 대구 유권자 앞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내게 사과한 민정당 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석방된 뒤에 국회에서 신상발언을 했는데, 내가 “마음에도 없이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찬성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더라. 내가 발언할 때 그렇게 난리를 쳤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침묵을 나는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영남대학 동기인 이용택 의원은 고생했다면서 봉투를 하나 건네더라. 뜯어보니 5만 원이 들어있었다. 이한동 의원은 따로 조용한 자리에서 ‘유 의원 사건은 정말 이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을 건넸는데, 아주 큰 위로가 됐다.

   
▲ ˝정의라는 진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유린당하고 멸시당하는 혼돈의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가치의 다양성은 결국 정의, 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통일국시 발언이 안 좋은 쪽으로 부풀려지면서 13대 총선, 15대 총선에서 상대 후보들이 나를 ‘사상 문제’가 있다며 공격했다. 억울했지만 언론에서도 제대로 해명해주지 않았다. 나를 적극 지지했던 지역의 아주머니들이 “유 의원보고 빨갱이라고 한다. 무서워서 못 찍겠다”고 하더라. 어떤 분들은 “우리는 유 의원 팬인데 상대방 운동원들이 간첩이라고 한다. 그래서 겁이 나서 도울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15대 총선서 박준규 후보가 “유성환 통일국시는 김일성 통일방식과 똑같다”고 왜곡했다. 대구 사람들은 이념에 아주 민감하다. 결국은 500표차로 떨어졌다.

다음 시대를 위하여

나는 정치권의 문제를 판단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직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항상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 정치권에 부족한 부분들이다. 간혹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기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 적도 있다. 지역감정의 극복, 정의에 대한 관심이 현 정치권의 과제들이다.

지역감정은 넘어서야 할 숙제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내무위원회 소속이었을 당시 김정렬 국무총리에게 “어려서 역사책을 보면 우리가 신라·고구려·백제로 나눠져 있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지역분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시엔 산 너머 있는 사람들은 다른 민족인줄 알았고, 미국도 남북전쟁을 하는 등 같은 민족끼리 갈라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게 역사책에 주석을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정의라든지 추상적 관념엔 무관심한 행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진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유린당하고 멸시당하는 혼돈의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가치의 다양성은 결국 정의, 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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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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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남 2018-07-31 12:03:34

    새삼 훌륭한 정치인도 있었구나 싶어지네요.
    어떤 민주화운동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과거를 팔아가며 살기도 하던데.
    아름다운 정치판(?)을 추억하게 되는 기사였습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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