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그들에겐 뜨거웠던 ‘초선 시절’이 있었다
[주간필담] 그들에겐 뜨거웠던 ‘초선 시절’이 있었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8.22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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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시절, 싹수 보인 정치인 공통분모 둘
시대상황 속 정부여당과 각 세우며 존재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역대 국회를 거쳐 간 국회의원은 3089명이다.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5~9번의 다선 의원을 했으며, 누군가는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또 누군가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했다. 정치 생명의 끝은 각기 달랐으나, 가슴에 처음 국회 배지를 달던 초선 시절이 있었다는 점만은 같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초선 시절은 어땠을까. 이들은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5‧16 군사 정변 △군부 청산 등 시대상황 속, 정부 여당과 각을 세우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YS 초선 시절…“3선 개헌은 안 됩니다”


YS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모습이다.ⓒ시사오늘DB(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서거 1주기 추모 사진전)
YS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모습이다.ⓒ시사오늘DB(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서거 1주기 추모 사진전)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정부 수립 이래 가장 젊은 국회의원 탄생에, 임기 초반에는 ‘만 26세’의 나이로 주목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반세기를 격한 두 선량(選良)’이란 제목으로, “산뜻한 넥타이에 머리까지 기름을 발라 싹 빗어 넘긴 김 의원이 서울 문리대를 나온 젊은 청년답게 세계 사조를 말하고, 세기말적인 사조를 비분강개해서 통탄하는 모습은 앞으로 국회에서 활약할 두 의원의 길을 미리 예고하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동아일보>는 YS의 데뷔 인터뷰를 통해 “그의 최하연령 신기록 수립은 의국방송에서까지 화제가 돼 특히 젊은 층에 자극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초선 시절은 나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맞서 3선 개헌 반대투쟁을 통해 진정 빛나기 시작했다. 1954년 제2차 개헌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담은 헌법 개정으로,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리로 통과됐다.

당시 YS는 이승만에게 간곡하면서도 기탄없이 3선 개헌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사님, 삼선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삼선개헌만 안 하시면 박사님은 위대한 국부(國父)로 역사에 영원히 남으실 겁니다.”

순간 이 박사의 안면근육이 실룩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이기붕은 전혀 예상 못했던 내 직언 때문에 한참 당황해하다가 볼멘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김 의원, 왜 그런 말씀을 드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99쪽.

YS는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의원 20여명을 규합해 대책을 논의하는 등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나 부결된 개헌안이 사사오입 논리로 가결된 후, 그는 7개월 만에 자유당을 떠났다. 이후 그를 비롯한 60여 명이 모여 호헌동지회를 구성했으며, 1955년 9월에 민주당을 창당했다.

 

DJ 초선 시절…“김준연 의원의 구속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1966-6대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발언ⓒ김대중 평화센터
1966-6대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발언ⓒ김대중 평화센터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4번의 도전 끝에 1961년 5월 재보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그러나 14일 당선 후 이틀 뒤 새벽 3시에 5‧16 군사 정변이 발생했다. 국회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해산돼 DJ는 금배지를 달지도, 의석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따라서 사실상 그의 초선 시절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그의 초선 시절은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filibuster‧무제한 토론)를 통해 빛이 났다. 김 의원의 폭로는 한일협정 비밀 회담 과정에서 오고간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에 대한 것으로, 일본으로부터 정치 자금으로 1억 3000만 달러를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폐회 하루 전에 구속동의안 처리를 서둘렀다. 이때 DJ는 의정사상 첫 필리버스터에 참가해, 총 5시간 19분 발언했다.

그는 급히 제안받은 필러버스터에 대본도 없이 참가했다. 발언대에서 △의원 체포동의안의 반대 이유 △정치적인 의도에 대한 문제 제기 △김준연 의원의 치열한 삶 소개 △김 의원 저서 <독립 노선> 낭독 등을 통해 시간을 채워갔다.

결국 이효상 국회의장은 안건 표결을 포기하고, 산회를 선포했다. 비록 다음 날 폐회 후 김 의원은 구속됐으나, 국회에서만큼은 구속동의안 찬성을 막아냈다.

“이렇듯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애국자를 동료 의원들이 범죄자로 만드는 데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고 의장, 볼일이 급한데 화장실에 다녀와서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의원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의장도 웃으면서 다녀오라고 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발언을 이어갔다. 의사당에서 내 발언은 동아방송이 생중계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신문지에 싸서 발언대 근처에 몰래 숨겨서 내 발언을 시시각각 국민들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시내 전파상마다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라디오를 들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170쪽.

 

노무현 초선 시절…“노동자와 함께 가슴이 녹아내리며 질문합니다”


1988년 11월 9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일해재단 청문회의 마지막 증인으로 참석했다.ⓒmbc 동영상 갈무리
1988년 11월 9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일해재단 청문회의 마지막 증인으로 참석했다.ⓒmbc 동영상 갈무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가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은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6월 임기 시작과 함께 전국의 노사분규 현장을 찾아다녔다.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는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냐”며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 발전시켜라”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행보는 여태껏 해왔던 ‘운동/노동 전문 변호사’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진가(眞價)는 11월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났다. 어김없이 농성장에 가려던 그를 붙잡은 보좌진에 의해 5공비리특위(제5공화국 비리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를 준비했고, 단숨에 청문회 스타로 거듭났다. 그는 “시류에 따라 산다”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굴하지 않고, 국민의 입장에서 분노를 대신했다.

“본 의원이 증인과 맞대서 대등한 관계에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본 의원은 증인의 10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애를 느끼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가슴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 1988년 11월 9일 정주영 회장 청문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中

결국 그는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정주영으로부터 “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사과를 받아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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