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보니] 5·18 진실투쟁史와 홀로코스트법, 유공자 명단 공개 쟁점, 왜?
[듣고보니] 5·18 진실투쟁史와 홀로코스트법, 유공자 명단 공개 쟁점, 왜?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2.23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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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 진상규명 변천사와
끝나지 않은 5·18 폄훼 논란에
과거사 재정립 필요성 ´대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한차례 폭풍이 지났다. 자유한국당 일각에서 나온 5·18 망언에 대한 공분은 컸다. 이미 5·18 민주화운동은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상태다.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만장일치로 등재됐다.

논란은 수그러들고 있지만, 새로운 과제도 남겨졌다. 5·18특별법 진상규명, 홀로코스트 방지법 도입의 필요성과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 역사 왜곡에 대한 사실 규명 재정립, 유공자 명단 공개 여부 등 여러 쟁점이 남은 상태다.

‘듣고보니’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 상황과 진상규명 변천사를 되돌아보며 향후 과제에 대해 알아봤다.

▲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만장일치로 등재돼 있다. 5·18왜곡논란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전수조사와 5·18유공자와 유가족이 원하는 이들에 대한 법률적 사회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국회 앞에 전시된 5·18 희생자 사진이 숙연함을 안기고 있다.ⓒ시사오늘

기록으로 보는 5·18
신군부의 전략과 진실 투쟁

“시민 여러분! 외부에서 많은 폭도들이 잠입,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낯선 폭도들은 신고하시거나 인상착의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1980년 5월 19일 헬기에서 배포한 유인물 중-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살펴 볼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주민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량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 1980년 5월 21일 신군부가 발표한 경고문 중-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유경남 학예연구사는 지난 14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긴급토론회에서 5·18 전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가 정리한 발제문 일부를 발췌해 옮기면 이렇다. 유 연구사는 5‧18민주화운동이라고 했지만, 정식 명칭인 5·18민주화운동으로 통일한다.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신군부는 “지역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했다. 당시 신군부는 5·18항쟁을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행위로 설명하며 ‘광주시민들의 시위 진압을 위한 계엄령’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작 전남대 정문과 광주시내 일원에서 발생한 사건은 숨겼다.

신군부는 이후 ‘광주’를 폭력과 파괴가 벌어지는 소요와 폭동의 지역으로 묘사하며 이 내용을 언론을 통해 전국에 보도했다. 특히 언론은 광주의 상황을 “불순분자”와 깡패 등 불량배들의 난동으로, 급기야 ‘북으로부터 온 간첩의 책동’으로 규정했다. 광주 시민들은 언론 및 정부의 이러한 왜곡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5월 18일의 상황을 ‘광주만의 사건’으로 제한하기 위한 신군부의 전략이었다. 이를 통해 전국의 민주화 시위를 광주로 유폐시키며 계엄령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죽음을 야기한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은 보도하지 않고 군경과 민간인의 사망 소식만을 보도함으로써 5·18항쟁을 ‘북한의 남파 공작원에 의해 발생한 사건’ 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과 연관 지었다.

이러한 언론의 왜곡은 신군부세력의 언론보도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보안사령부 언론반은 1980년 4월 1일부터 검열세부지침을 만들어 언론을 통제했다. 이 지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시행됐다. 계엄사 보도처는 5월 18일 10시 40 22개 언론사 편집부장을 불러 보도검열지침을 통보했었다.(국방부 과거사위, 2007: 57-58).

신군부 세력은 ‘북한의 남파 공작원 연루설’과 관련해 ‘이창용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이창용(본명 홍종수)은 1980년 5월 24일 서울역에서 체포된 북파 간첩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창용이 “광주지역에 침투해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임무로 침투한 북괴 간첩으로 독침까지 휴대하고 있어 시위군중들 속에 들어가 시위자를 살해해, 폭동을 더욱 격화시킬 준비마저 갖추고 서해안으로 침투, 잠입한 자”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그는 5월 16일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2군 사령부는 이창용의 검거를 계기로 5월 25일 전교사에 “공산주의자와 폭도 양민이 분리됨으로써 작전을 실시할 여건 조성”이라고 ‘충정작전 유효지시’를 하달했다. 그들은 5·18이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 다음날 5월 26일 육군참모총장 또한 전교사령관에게  “소요사태가 장기화돼 불순분자 내지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중시되고 있고, 5월 23일 이후부터 양민층과 공산주의 및 폭도가 분리되어 진압 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되었다”고 지시했다.(국방부과거사위, 116-117).

결국 신군부 세력은 이창용 사건을 계기로 5·18이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조작하는 허위사실을 언론에 유포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계엄군은 5월 21일경 광주 상황이 악화되자 계엄사령부는 호남출신 장교들을 광주로 보낸 기록이 있다. 이들은 시위대에 대한 선무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해 계엄사에 보고했다. 광주소요사태 상황일지 등에 기록된 이들의 보고에 따르면 소요가 확대된 주요 원인이 공수요원들의 지나친 과격 행동이 시민 감정을 자극했다는 것이었다.

김○○(국대원 중령) : “군인들의 데모 진압이 너무 가혹하여 주민들의 증오감이 너무나 큰 것 같다.”

장○○(5공병 여단 중령) : “최초 11공수단이 군중들에게 몽둥이로 과격하게 때리고 군화발로 밟아서 ‘전라도 새끼들 다 때려죽인다’고 해 자극 받은 것이 크게 확대된 원인이다.”

배○○(3군사 군종 참모 대령) 외 3명 : “데모 진압 시 공수 여단 요원이 무리하게 해 더욱 악화됐다.”

이○○(합참 2국) : “계엄군의 과격한 행위로 유발된 사건으로 보며, 광주 시민의 요구가 상부에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진압하면서 항쟁이 진압됐지만, 시민들의 ‘5·18’은 계속됐다. 시민들은 항쟁 시기 ‘사실’들을 정리해 5·18의거 이후 경과일지와 같은 민중의 기록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용이 광주외의 지역과 해외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실투쟁’이 새롭게 시작됐다.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 6월 1일 서강대 김의기 학생이 만든 유인물-

1981년 5월 27일 서울대 도서관 6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은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자신의 몸을 던졌다.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던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오랜 단식 끝에 숨을 거뒀고, 광주에서는 1980년 이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항쟁 ‘이후’ 사람들은 1980년 5·18의 진실을 말하는, 죽음의 투쟁을 계속했다.

1987 後 역대정부의
진상규명 변천사…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에 대한 봇물이 터진 계기는 1987 체제를 거치면서다. 본격적인 재조사를 비롯해 관련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 등 역대 정부의 변천사는 어떻게 될까.

유 연구원의 발제문에 따르면 1987년 6월 항쟁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였다. 6월 항쟁을 계기로 ‘광주사태 치유방안’이 만들어졌고, 국가차원에서 5·18에 대해 공식적인 재평가가 시작됐다. 노태우 정부가 구성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5‧18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을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발단”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진실 발견의 어려움과 조사의 지연에 따른 피해자 보상의 지체가 불가피하다’고 하며 5‧18의 진상규명이 국민 ‘화합을 저해’한다며 중단하고 말았다.

야(野)대 국면을 이용해 1988년 7월 국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특별위원회는 5·18에 관한 사건들을 조사했다. 결국 ‘광주청문회’가 구성됐으며, 5·18의 관련자들이 국회에 출석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진술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했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며 현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로서 그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높일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는 특별담화를 발표됐다. 이후 시민단체의 진상규명 촉구와 함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정축재 내용이 국회에서 폭로된 것과 맞물려 5·18특별법이 제정됐고,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도 전격 구속됐다. 이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위한 조사와 재판이 진행됐으며, 검찰 수사에 의한 5·18항쟁의 많은 사실들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또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형이 선고됐다.

5·18특별법에 의거한 조사 결과, 재판 도중 사망자를 제외한 15명에 대한 처벌이 1997년 4월 18일 대법원에서 이뤄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그러나 5·18과 관련해 현장 지휘관들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됐다. 김대중 당선자는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제의했고 이들에 대한 사면 복권이 이뤄졌다. 또 김대중 국민의 정부인 1998년 8월 15일 관련자 전원에 대한 특별복권이 이뤄졌다. 이와 함께 5·18민중 항쟁 진압 및 12·12군사반란에 참여해 수여된 훈장 또는 포장의 박탈 운동이 벌어져 이들에 대한 훈장은 5·18특별법과 상훈 법에 의거해 전원 박탈됐다.

노무현 정부는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고 규명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중복 자료를 제외한 4만 8000여 쪽의 자료를 수집, 시위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 71명에 대한 면담을 실시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됐다.

끝나지 않은 왜곡 폄훼 논란과
과거사 정립의 과제와 쟁점은

지난 8일 극우 논객 지만원 씨가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 초청된 순간부터 일파만파 논란이 커질 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그동안 지 씨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군에 의한 학살을 주장하며  “광주 폭동” “북괴군의 적화전략” “반미주의가 뿌리” “간첩 선동” “집단발포 한 쪽은 5‧18 무장단체”라며 왜곡 비방 폄훼해왔다. 이에 5‧18 유가족은 지 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지 씨의 주장이 역사 평가에 영향을 못 준다”며 무죄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지 씨의 발언이 다시금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번 공청회 때문이었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 주최로 열린 공청회에서 지 씨는 북한군 개입설 주장을 거듭 제기했다. 공동 주최한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은 “5‧18은 폭동” “괴물 집단” 등 모독 논란으로 거센 질타를 받았다.

홀로코스트 방지법 추진
형사 처벌 vs 기본권 침해

이 일로 지 씨를 비롯한 5‧18왜곡에 대한 전수조사와 다음 세대를 위한 과거사 정립 작업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특히 과제를 놓고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5‧18 왜곡 행위에 대한 처벌법 등 일명 홀로코스트(대학살) 방지법 요구가 나오고 있는 점이다.

최순영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철학박사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부정(사실왜곡) 처벌을 도입한 나라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독일, 헝가리, 이스라엘, 폴란드, 포르투갈, 스위스 등 17개 국가다. 이에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연간 100건 이상의 유죄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구체적 부정처벌법에 대한 사례는 어떨까. 독일 형법 130조 대중선동죄에 적용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수업시간에 아우슈비츠가 거짓이라고 말한 교사가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화학자 루돌프는 화학물질 치클론 B를 통한 아우슈비츠 대학살의 불가능성을 주장해 14개월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웹사이트와 출판물을 통해 인종증오를 조장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인하였다는 이유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최 박사는 프랑스 사례로 리옹대학교 문학교수 포리송은 르 몽드지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며 히틀러의 학살 명령 사실을 부인하는 기사를 기고해 벌금형을 받고 해직됐다고 했다. 이처럼 혐오표현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연간 100건 이상의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은 따로 처벌법을 두지 않았으며, 스페인과 미국은 홀로코스트 부정처벌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5‧18 망언을 계기로 홀로코스트 방지법 논의가 커지고 있다. 민중평화당 장병완 5‧18 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장은 지난 15일 “한국당 홀로코스트 부정처벌법을 통과시켜서 의도적인 역사 왜곡과 반헌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사처벌을 엄중하게 받도록 할 것”이라고 향후 법 개정 추진을 예고했다. 김중현 민중당 공동대표는 지난 21일 “유럽의 사례에 비춰볼 때, 우리도 5‧18 민주화운동 왜곡행위 처벌법, 곧,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 행위 처벌법을 제정할 근거가 충분하다”며 “국회에서 이에 대한 법안 제정 논의가 시작되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난 21일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얼굴인식 전문가의 과학적 분석결과 지만원 씨가 주장한 ‘5·18광수’는 북한 특수군이 아니라며 북한군 개입은 사실이 아니라며 5‧18 사실왜곡에 대한 법의 심판을 요구했다.

하 의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한 임영선 지만원피해자대책위원회 공동회장도 일부 탈북민들이 5·18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지만 이는 생계를 위해 지만원 같은 일부세력에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하 의원은 지만원의 거짓 주장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국론분열과 갈등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며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법적 처벌이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과 충돌할 수 있다며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최 박사는 같은 자리에서 “사실왜곡(홀로코스트 부정), 비방, 모욕 명예훼손 등에 대한 법적규제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며,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기본권 사이의 이익형량과 비례성 심사가 주요 관건”이라며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대한 법적규제는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 피해의 최소성, 균형성을 고려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 가치에 반한다는 점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바른미래당 이언주 의원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5·18 폄훼도 반대하지만 그걸 비판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것도 반대한다”며 “이런 식의 사고는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며 결국 헌법상 민주공화국의 원리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에 반하는 반대금지법, 반대자처벌법”이라고 비판했다.

유공자 명단 공개 여부 쟁점으로
"국민의 알권리와 명예 회복 위해"

최근 5·18 망언 논란이 불거지면서 가짜유공자 진실 공방전이 대두되며 5·18유공자 명단공개 여부 논쟁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실상 가짜유공자 의혹은 과거에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있을까. 없을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지난 2000년 가짜유공자 사건 소동과 관련 수사 결과를 참조해 볼만은 하겠다. 

같은 토론회 현장에서 김상집 5·18공법단체설립추진위원장이 발제문을 통해 소개한 ‘가짜유공자’ 사건에 대한 2000년 6월 23일자 <한겨레신문> 기사에 따르면 광주지검이 23일 발표한 ‘가짜 5·18 보상자’ 중엔 과거 조직폭력배들까지 대거 포함됐다는 내용과 검찰은 올 4차 보상신청자 868명 등을 상대로 가짜 여부를 지속적으로 밝혀나갈 방침 등이 전해졌다. 이외에도 ‘5·18 허위보상’ 100여명 적발 등의 보도가 있었다고 발제문을 통해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이 같은 가짜유공자 사건은 검찰수사 결과 최종 기소자 11명 모두  5·18민주유공자로 결론 났다며 가짜유공자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가짜유공자 사건으로 무장시민군이었던 5·18민주유공자들은 계속해서 가짜유공자로 의심을 받게 됐다”며 “심지어는 5·18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기꾼이거나 관련이 있더라도 5·18정신에 해악을 끼치는 잡범들로 매도당해 왔다”고 했다.

또 그렇게 매도당한 데에는 가짜유공자 사건의 배경이 주도권 다툼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김 위원장은 “5·18구속부상자회의 주도권 다툼이 원인이었다”며 “당시 5월 민주항쟁의 가장 큰 조직인 5·18구속부상자회는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했던 재야, 학생출신, 무장시민들과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며 “문제는 이 세력들의 다수가 5월 항쟁 당시 도주했거나 총기회수를 주장한 사람들로 무장시민군과는 화합하기 힘든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가유공자 명단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도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김 위원장은 제언했다. 그는 “현재 국가유공자는 독립유공자, 호국유공자, 민주유공자로 구성돼 있다. 국가유공자를 선양한다지만 국가보훈처는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 대표적인 몇몇만 알릴뿐이어서 국민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선양하고 있다”며 “국민은 표창 내용, 국가유공자 지정 사유 등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했다. 특히 “독립유공자는 1만 3000여 명, 4·19 5·18을 합한 민주유공자 7500여 명은 모두 2만여 명밖에 되지 않으나 호국유공자는 90만 명이 넘고 특별법에 의해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람은 200만 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국민세금으로 쓰이는 만큼 공개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다.

5·18 유공자 명예와 공정성을 위해서도 명단은 공개될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바른미래당 이언주 의원은 근래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역사적 비극이라는 현실은 어떤 경우든 변하지 않는다.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유공자 명단은 확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유공자를 위해서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편 비공식 집계로 보면 5·18 유공자 인원은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5·18 기념재단 관계자는 지난 14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유공자 현황 관련 “공식적 집계로 현재 보상을 받은 인원은 5800여 명이다. 이들 중 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이들이 4475명, 당시 사망자는 165명”이라며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수 있다. 사고를 당했는데 증빙을 못해서 인정을 못 받은 이들도 있고, 유공자임에도 신청을 안 한 이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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