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의 時代架橋] 日, 한국 미래 정조준 타격…兩敗俱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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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時代架橋] 日, 한국 미래 정조준 타격…兩敗俱傷
  • 이병도 주필
  • 승인 2019.07.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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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국력, 극일(克日) 초일(超日) 전환점 돼야
단기·중장기 ‘투트랙’ 접근을
교역질서 교란, 전세계와 공조 철회 끌어내야
한일 외교전, 국가 역량 시험대…美가 중재 나설 때
정글 환경, ‘불확실성 수렁’에 빠진 韓 기업들
유엔사, 한반도 유사시 日 자위대 투입 길 열리나
확산되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 지혜롭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한·일 통상전쟁의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의 비상등이 들어오고 있다. 애꿎은 기업들이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심각한 사태다.

한국 경제는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으로 수출 감소, 경제성장률 둔화에다 최악 실업난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큰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가적 위기가 올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다시 한국 기업들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는 양상이다. 일본 은행들이 70조원에 육박하는 한국 기업·은행에 대한 대출금 만기연장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일본이 한국의 급소를 찌르고 나온 예상밖 상황은 정글로 변한 글로벌 경영환경을 웅변한다. 한순간 방심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체질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의 시급성을 일깨운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소재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하면 우리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각각 70%, 50% 이상의 합계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차량용 디스플레이 글로벌 시장에서는 삼성·LG디스플레이가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수출규제로 이들 기업이 타격을 입으면 글로벌공급망과 세계 시장에 큰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글로벌시장에서 반사이익을 보는 기업도 있고 피해를 보는 기업도 있겠지만, 일본의 부적절한 규제조치로 세계 시장에 혼란이 생긴다면 총체적인 책임은 일본이 져야 한다.

기술은 국력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을 일본이 16명이 타는 동안 한국은 한 명도 없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한국은 이제라도 이번 사태를 기초 기술력 배양과 부품·소재산업의 육성을 위한 일대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낡은 규제와 기득권을 타파하고 산업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한·일 통상전쟁의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의 비상등이 들어오고 있다. 애꿎은 기업들이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심각한 사태다.ⓒ뉴시스
한·일 통상전쟁의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의 비상등이 들어오고 있다. 애꿎은 기업들이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심각한 사태다.ⓒ뉴시스

역사 둘러싼 정치·외교 갈등

이번 사태의 본질은 역사를 둘러싼 양국간 정치·외교 갈등의 재현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 준비는 1876년 2월 27일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체결부터 강제병합까지 34년 5개월 26일이 걸렸다. 그 후 일제의 한국 강점에 따른 온갖 피해는 헤아릴 수 없고, 잴 수조차 없을 만큼이다. 이처럼 치밀한 일본답게 이번 경제 보복 준비도 그러했던 반면, 우리 정부는 과연 어땠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최근 자국의 안보 우방인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것은 한국을 '국제적으로 믿을 수 없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장기 포석(布石)이다. 문제는,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대비하는 능력이 문재인 정부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단기 대응과 중장기 대책을 구분하는 ‘투트랙’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국산화 비율을 높이고, 특정국가 의존형 산업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한·일 통상마찰은 강대강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북한까지 걸고 넘어졌고, 문재인 대통령은 "더 이상 막다른 길로 가지 말라"고 일본에 경고했다.

최근의 국제정세는 무역과 정치·안보가 분리되지 않은 채 복잡다단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른바 ‘정경분리’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치열한 한·일 경제전쟁 속에서도, 최근 유엔군사령부가 한반도 유사시 전력을 받을 국가에 일본 등을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주목된다.

유엔사를 대표하는 미국이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가 있는 일본과 실제 합의한다면, 일본 자위대는 유사시 한반도에 유엔기를 들고 투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이런 방안은 한국민 정서와 배치되고, 북한이나 중국 등 주변국도 반발할 것으로 보여 논란이 될 가능성이 높다.

日, 축적된 불만 터뜨려

그런 점에서, 최근 한·일 갈등을 키운 정부의 외교 무능 또한 책임이 가볍지 않다. 정부의 반기업 정책으로 가뜩이나 빈사 지경에 빠진 기업들은 외교 실패의 불똥까지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문 정권이 들어선 후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지속적인 일본 일부지역 수산물 수입 불허,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 등으로 축적된 불만을 터뜨린 결과다.

그렇지만, 일본이 정치적 이유로 상대국에 경제보복을 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바세나르 협약 등 국제 규범에 명백히 위반된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는 “지금 공은 한국 쪽에 있다”고 책임을 우리 측에 떠넘겼다. 적반하장이다.

정부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소재 수출규제를 WTO 이사회에 긴급 안건으로 올려 국제 여론전에 나섰지만, 일본은 문재인 대통령이 요구한 보복 철회는 물론 정부 간 협의 제안조차도 거부하며 추가 보복까지 예고했다. 

문 대통령의 양국 협의 요구를 일본 정부가 거부함에 따라 양국 간 무역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을 우려가 한층 커졌다.

일본은 오히려 수출규제 품목을 공작기계와 화학제품으로까지 확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다음 달 일본이 일부 전망대로 주요 부품·소재의 수출대상국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결정을 내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일본이 1,700개에 달하는 전략물자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면 피해가 모든 산업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주요산업이 올 스톱될 수도 있을 것이란 분석들이다. 

강대강 충돌은 양국을 패자로

사태가 장기화할 공산도 크다. 

경제보복의 빌미를 제공했던 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다루자며 일본이 내놓은 3국 중재위원회 구성안에 우리 정부도 수용 불가 방침을 천명하고 있는 탓이다. 한 치의 양보 없이 꽉 막힌 상태가 오래가면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 등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미증유(未曾有)의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을 넘어 두렵다. 문 대통령도 사태 장기화 가능성을 인정했다. 기업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한국과 일본 제조업은 긴밀하고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퇴로를 닫아둔 강대강 충돌은 양국을 패자로 만들 뿐이다. 한일 무역전쟁은 결국 양국 모두에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兩敗俱傷(쌍방이 다 패하고 상처를 입음)이 되고 말 것이다.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철저히 국익 관점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그렇다. 정부나 정치권과는 무관한 민간 차원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관광 자제 움직임은 감정싸움을 키울 수 있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사태의 전모와 장단기 대책 및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 지, 집중 진단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 문 정부 들어 파국

한·일 간 과거사 문제는 작은 뒷걸음질에도 거센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전체적으로 경제·안보·문화 협력이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말기부터 나빠지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부에서 심각하게 악화했으며, 문재인 정부 들어 파국을 맞고 있다. 

현 집권세력의 ‘반일(反日) 프레임’은 매우 강력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했다. 민주당 출신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친일기업 불매운동, 진보·좌파 출신 교육감들은 친일 용어 청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본에 맞서려면 일본을 더 잘 알아야 하는데, 문 정부 들어 대일(對日)외교는 완전히 붕괴했다. 박 정부 때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끌었던 주역이 적폐로 몰리면서 주일 대사관 경제공사는 4개월째 공석이다. 

19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 문 정권 출범 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30일 배상 판결을 확정한 것도 그런 ‘반일(反日) 프레임’ 맥락과 무관치 않다. 그동안 법원은 국가 간 조약에 대한 ‘사법 자제’ 원칙을 가급적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TV아사히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 대책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규제는)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고 감정적 보복임을 실토했다.

아베 총리는 또 “문 대통령이 대북 영향력이 없다”며 외교적 결례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을 적대적 상대를 칭하는 표현인 ‘무코가와(저쪽편, 상대편)’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로키로 일관해오던 청와대가 적극 대응 방침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일본의 이번 조치를 보복적 성격으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아베 총리의 최근 일련의 발언들은 국가 간 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 예의조차 망각한 것이며, 사실 확인도 안 된 내용을 국가 최고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도 우려가 적지않다. 한 나라의 정상이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논리도 빈약한 견강부회의 발언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누적적자 708조...‘脫 일본’ 공론화 거쳐야

아베 정권이 계속 강경 모드를 고집한다면 장기적으로 한일관계와 동북아 질서에 씻기 힘든 상처를 남길 것이며, 일본 경제에도 자충수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작년까지 54년간 한해도 일본에 무역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누적적자만 708조원이나 된다. 이런 관계는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양국 관계가 악화돼 무역이 중단되면 일본이 더 손해를 본다. 일본 언론들이 이번 조치 중단을 촉구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둘째, 대일본 무역적자가 굳어진 데는 시장원리가 그 방향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즉 일본과는 적자를 보더라도 일본의 싸고 좋은 부품을 사서 쓰는 것이 나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부품을 일본에 의존해온 것이 지금과 같은 갈등 상황에선 약점이 된다. 수입선 다변화나, 부품 국산화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장기 대책은 WTO 체제 속에서 형성된 국제 분업을 거슬러 ‘탈일본’ 목표를 명시해야 하는 만큼 적극적인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따른 타격을 우려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산을 대체할 채비를 본격화하면서 이참에 우리 제조업의 구조적 문제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최근 ‘2030년 제조업 세계 4강’(수출액 기준 현재 6위)을 제시했는데, 이를 위해서라도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 경제적 ‘극일’(克日)을 위해서는 정부가 관련 업계와 전방위 접촉해 면밀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전면적 경제 전쟁 가능성

한국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냉전시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가 뚜렷한 만큼 외교전략도 단순했지만, 냉전 해체 이후 중국 경제의 부상, 일본의 보수화 등 주변 정세가 복잡다단해지면서 정교한 상황 관리가 절실해졌다. 

최근 사태는 일본이 자동차나 정밀화학 등 다른 분야 핵심 부품·소재도 규제하는 제2, 제3의 경제 보복 조치들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물품을 규제하는 캐치올(catch all) 규제를 발동할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사실상 전면적 경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정부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에 맞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6조원을 투자한다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고순도 불화수소(에칭 가스) 등 일부 소재의 재고가 2~4주 분량에 불과해 이달 안에 공장이 멈출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정부 대책회의에 불참한 채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경제인들과 만난 것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일본 정부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문제를 다룰 중재위원회 설치’ 제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답변 시한(18일)을 앞두고 우리가 불응하면 2차 보복을 가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일 무역전쟁이 터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대북제재 위반’ 주장은 '안보' 명분 포장

더욱이 아베 일본 총리는 경제보복이 우리 정부의 ‘대북제재 위반’과 관련 있음을 내비치는 판이니 어디로 사태가 번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본 정부의 이런 행태는 대한(對韓) 보복 규제 발표 이후 일본 안팎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문제에서 촉발된 한일 갈등에 경제 보복 조치를 동원한 데 대해 반(反)자유무역적이고 일본 경제에도 해가 된다는 비판론이 일자 안보 때문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여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민감해하는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을 들고나와 향후 미국이 한일 간에 중재자로 개입할 여지를 좁히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아베 총리는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에 수출한 에칭가스의 일부가 화학무기용으로 북한에 들어갔다는 식의 의혹만 부풀리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지렛대로 경제보복 카드를 빼든 아베 정부가 무리수를 두는 인상이다.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추가 보복조치를 위한 명분 축적에만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정부는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다"며 부인했고, 우리 관련 기업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전문가들도 북한으로의 유출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사실, 자유무역에 어긋나는 규제를 강력히 제한하는 WTO도 명백한 안보전략 차원의 수출규제는 허용하고 있다. 일본은 이를 악용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의도가 분명해진 만큼 국제사회에 수출규제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확전 가능성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근거도 없이 '북 관련설'을 퍼뜨리는 건 한국이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지난해 북한산 석탄이 러시아산으로 둔갑해 한국으로 불법 반입됐고, 미 재무부는 북한의 불법 해상 거래 주의보를 발령하면서 의심 선박 리스트에 한국 배 한 척을 명시하기도 했다. 한국이 대북 제재 위반 '요주의 국가'가 된 틈을 일본이 파고든 셈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경제보복을 거두어들이기는 커녕 '중재위 구성'에 대한 한국의 답이 없다며 "모든 선택사항을 검토해 대응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징용 배상 판결 문제가 자기들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추가 보복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예고나 다름없다.

일본 정부가 추가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것은 사실상 양국 간 무역 단절을 각오하겠다는 의미이다. 국제적으로 전략물자는 15개 항목, 218개 품목, 1,700여개의 물자로 세분화해 각각의 기준을 정해 놓고 있다. 이중 미사일, 원자력, 화학무기에 사용되는 것을 빼고 민간에서도 함께 사용하는 품목이 1,100여개에 달한다. 탄소섬유, 태양전지, 로봇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제 정치적으로도 한국을 이란, 러시아, 중국,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로 취급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日 부처 총동원, 한국 급소 찾아

일본은 치밀한 연구와 전략 아래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랫동안 부처가 총동원돼 한국의 급소를 찾아왔고, 한국의 대응에 따른 시나리오별 대책도 다 마련해 놨다는 관측들이다. 

일본이 우리 급소를 정확하게 죄었고. 우리는 이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치명상을 입거나 굴욕적인 패배를 당할 판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는 한일 기업의 출연으로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처리하자는 제안만 던져놓고 일본이 거부하자 속수무책으로 대화자체를 중단한 채 후속 조치에 나서지 않는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일본의 보복 규제는 내용이 확정적이지 않고 변동성이 크다. 재량권의 영역을 극대화함으로써 계속 상황을 장악하고, 경제 마찰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아베 신조 정부의 의중이 엿보인다.

일본이 취할 행동의 시나리오별로 최소치에서 최대치까지 면밀하게 예상 피해를 파악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갈등에 이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 문제까지 현안으로 불거지는 국면이다.

금융시장은 실물시장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빨리 포착해 반영한다. 일본 보복이 공식화한 이후 6거래일 동안 한국 증시 시가총액은 51조 원 증발했다.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실패 여파로 실물경제가 극도로 악화한 상황에서 금융 충격까지 겹치면 심각한 위기가 닥칠 수 밖에 없다. 

직접 대결 한국 피해 ... 국제사회 동조가 우선

한일 간에는 대응-맞대응의 감정적 대결 양상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며칠간은 전략적 침묵을 택했던 한국 정부도 정면대응으로 선회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일본의 수출 규제는 명백한 경제 보복이라며 우리도 상응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금지 품목을 확대하거나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는 등이라고 한다.

일본도 추가 보복 조치를 준비하고 있으며 한국 내 일본 은행 자금 18조 원을 동원한 금융 보복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한국 국민 사이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여행 자제운동 등 반일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쓸 수 있는 경제보복에 비하면 한국이 일본에 가할 수 있는 보복수단은 중과부적이다. 우리가 강대강 대립을 택한다면 그것은 사실상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한·일 간 경제 전쟁이 벌어지면 한국 피해가 더 클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이 한국 업체들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고 국내총생산(GDP) 증가를 둔화시킬 것"이라며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5월 2.2%에서 0.4%포인트 낮춘 1.8%로 내렸다. 

일본이 타격 목표로 삼은 반도체 하나만 보더라도 지난해 수출이 1천267억달러, 약 148조원에 달한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9%, 지난해 국내총생산 1천893조원의 7.8%에 육박한다. '한국 경제의 쌀'인 반도체가 흔들리면 한국 경제 전체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WTO 상품·무역이사회에 수출규제를 안건으로 올린 것은 일본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려 교착국면을 타개해보려는 의도로 읽힌다. 정부는 이날 이사회에서 "일본이 수출규제의 근거로 내세운 '신뢰 훼손'과 '부적절한 상황'은 WTO 규범상 수출규제 조치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우리 기업에서 부품을 제공받는 애플이나 퀄컴 등 미국 기업과 화웨이 등 중국 기업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국제사회의 반발 강도가 커지는 건 시간문제일 수 있다. 현시점에서는 일본 조치의 부당함과 자유무역 원칙 위배를 강조해 국제사회의 동조를 끌어내는 게 먼저다.

하지만 국제 분쟁 절차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사이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다각도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미·일 3국 협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미국의 중재를 유도하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10일(현지시간) 미국을 전격 방문했다. 김 차장은 방미 기간 행정부 및 의회 관계자 등을 만나 북핵 이슈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부당성도 적극적으로 알릴 것으로 보여 미국의 중재 역할도 요청할지 주목된다.

허술한 대응 실망감, 대화 복원해야 

향후 사태 전개방향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지난달 한·일 청구권협정(1965년)에 따른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했다. 우리가 거부하면 추가 보복이 예상된다. 국내 통상전문가들 중에는 오히려 중재위 요청을 수용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이도 있다. 당장 시간을 벌 수 있는 데다 중재위에서 어떤 결론이 나든 두 나라 정부 모두에 일종의 출구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30대 그룹 총수들은 정부가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일본이 요청한 제3국 중재위 구성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대통령의 의견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정부의 허술한 대응에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이 경제보복을 여러 차례 경고했는데도 대비에 소홀했던 정황이 잇따라 드러나 더욱 그렇다. 

반면 일본은 규제 대상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감광재)만 해도 전문가만 알 수 있는 광원 파장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한국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까지 방해할 정도로 경제 보복을 세밀히 준비해 대조를 보였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가장 아픈 3가지를 정확히 집어냈다”고 실토했을 정도다. 

지난 5일 범정부 차원의 외교전략조정회의가 출범하는 등 정부와 기업이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잰걸음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정치권도 국회 차원의 방일단을 파견키로 하는 등 해법 마련을 위한 초당적 대처에 나섰다. 한일의원 교류에도 찬바람이 불어 효과는 미지수지만, 사사건건 대립과 몽니만 거듭하던 여야가 국가적 어려움 앞에서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은 모처럼 보는 성숙한 자세여서 반갑다. 일본 정치체제의 특성상 국회가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대화채널 복원에 유리한 점도 많다.

해결책, 정치 외교적 접근을

이번 사태의 발단과 전개과정에는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그렇고 이후 일본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해결책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와 외교에서 찾아야 한다.

한일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냉철한 이성과 절제력을 보여야 한다. 강대강으로 맞서면 모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정부 간 협상이 어렵다면 우선 민간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과거사 문제는 한 번에 해결하기 힘든 만큼 양국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찾아야 한다. 

양국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외교적 갈등이 경제 협력까지 파탄시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지금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선진국다운 절제와 실용주의를 바탕에 두어야 한다.

정부는 앞으로 일본의 반격이 예상되는 만큼 국제외교 무대에서 일본이 내세운 명분과 이유를 조목조목 무너뜨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일본의 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한국 지지를 얻어낸다면 상황 악화 차단 효과와 사태 해결의 모멘텀도 생길 수 있다. 

이와 함께 자유무역을 옹호해 온 유럽연합(EU)과 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을 우군으로 포섭하는 데도 전력을 투입해야 한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일본을 비판한 것처럼 EU 회원국들의 호의적 입장을 이끌어 내야 한다.

정부가 외교적 대응 기조를 밝힌 건 옳은 선택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이 9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의 대한 수출규제 강화에 대해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건 유감스럽다. 과거사 갈등에 묶여 양국이 상호이익을 증진할 기회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톱다운 방식 수습책 찾아야 

이번 사태를 촉발한 원인과 본질은 경제가 아닌 정치·외교 문제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 참사란 지적마저 나온다. 

경제·외교 전문가들이 한·일 양국 정상 간 담판을 통한 톱다운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두 정상이 직접 나서 문제를 푸는 것이 한·일의 兩敗俱傷을 막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지만, 핵심은 선진 외국에선 관행화한 외교 문제에 대한 ‘사법 자제’ 원칙을 무시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있고, 문 정부가 이를 방치하면서 악화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은 한국의 소중한 경제·안보 자산이다. 국내정치를 의식한 공허한 보여주기식 조치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안보·경제 등 심각한 일파만파가 예상된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일본의 수출통제는 장기화될 수 있다. 이미 실무 협의로 풀릴 문제가 아니게 됐다. 

문 대통령은 국익과 실질에 집중해야 한다. 보여주기 이벤트는 접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담판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중재를 부탁하는 등 다각적 실질 해법을 찾는 게 급선무다. 남관표 주일대사가 최근 “양국 정상회담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한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번 갈등은 한·일 정상의 상호 불신이 한몫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한·일관계 문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니 문제의 실마리는 두 정상이 풀어야 마땅하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만나 톱다운 방식으로 불신을 해소하고 갈등을 수습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 될 것이다. 

정부는 관료와 민간 전문가 등 인맥을 총동원해 한·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일본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안보·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양국의 무역분쟁은 경제는 물론 북핵 협상 등 안보 측면에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태가 더 악화하기 전에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만나야 한다.  

미국 중재자 역할 중요

외교적 노력 과정에서는 과거와 달리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미국의 태도가 변수가 될 것이다. 

한미·미일 동맹으로 한미일이 삼각동맹을 이룬 만큼 미국이 한일 분쟁 해결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축적된 외교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침묵은 계속되고 있다. 한일 양국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데 공동 이웃인 미 행정부는 목소리 내기를 자제하고 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은 문 정부에 '희망적'이지 않다. 미 국무부는 "미국은 한국·일본과의 3자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극히 원론적인 입장 표명이다. 물론 한일 관계가 더 악화될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현재 미일의 밀착 강도로 보아 미국이 중재에 나선다 해도 문 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미국은 과거 한·일 갈등이 한·미·일 삼각 동맹 체제를 위협할 수준으로 치달을 경우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중재에 나선 게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2014년 4월 방한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것을 보면 엄청나게 악하고 나쁜 인권침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 국민의 이해를 보면 과거보다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최근의 한·일 갈등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기본가치로 받아들이는 국가라면 용인할 수 없는 행태다. 미국이 ‘이웃집 불구경하듯’ 방치할 수 없는 이유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의 수출 제재는 비단 한국의 수출품뿐 아니라 미국 첨단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분업 체제는 전 세계적으로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든든한 한·미·일 삼각 공조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삼각 동맹은 유력한 외교 수단이다. 양국에서 반일, 반한 정서가 강화되면 공조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이에 침묵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 외교정책은 전통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사안의 파급력이나 갈등양상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선량한 중재자의 역할에 나서는 게 옳다. 양국의 주장을 귀담아들은 뒤 미국이 국제 규범과 상식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적절한 조치를 권하는 게 좋은 이웃으로서 할 일이다.

시민운동, 국익 극대화 방향으로

최근 국내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민간 차원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일본 여행 자제나 중단 같은 움직임이 퍼지는 분위기다.

한국마트협회와 전국 중소유통상인협회 등 27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지난 5일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업종에 걸쳐 일본 제품 판매 중지 운동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마트협회 200여곳이 반품과 발주 중단을 했고, 일부 중소상인과 자영업자는 일본 맥주와 커피를 전량 반품하고 판매 중지에 나섰다. 

온라인에서도 일본 불매 기업 리스트 공유와 함께 일본 자동차와 전자제품, 의류·신발 등의 브랜드가 언급됐다. 일본 여행 커뮤니티에서도 일본 여행 취소 인증샷이 연이어 올라오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불매운동이 최선의 방법일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일 양국 간 감정을 더 악화시키고 일본과 거래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에도 타격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 시민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갈등 조장, 국수주의로 흐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일본 정부에 대한 정당한 불만 표출은 당연하고 존중받아야 하지만, 지혜롭고 슬기로운 대처가 요구된다. 정부와 시민들의 대응은 전적으로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물론, 지금 불매 분위기에 동조하는 사람의 의지, 불매운동에 따른 고통이나 손실 감수 같은 결연한 뜻은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흔히 이런 움직임은 이성보다는 비합리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탓에 또 다른 갈등을 일으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불매운동 등은 정부 차원의 대응을 지켜보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부품·소재산업 현실 냉혹 

국내 산업 대책도 시급하다. 산업구조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경우 외풍에 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수출은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 번도 대일본 무역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이 수출규제에 나선 소재·부품 산업은 우리 산업 수출의 50%, 무역흑자의 27%를 차지한다. 핵심소재와 부품을 일본에 의존해온 우리로서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일본의 소재·부품 산업에 대한 수출규제는 이번에 해결된다고 해도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산업구조 다변화뿐이다. 

문 대통령과의 간담회에 참석한 기업인들은 “제조업을 뒷받침할 기초사업이 탄탄해야 한다”며 수입선 다변화 등 부품 조달망 다각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러시아·독일 등과 협력하는 한편 전략부품 산업 분야의 인수합병(M&A) 필요성도 제기됐다. 

산업구조 다변화는 대통령의 의지나 정부의 일회성 이벤트만으로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대·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꾸준히 이뤄지고 기업들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 일본의 3대 수출 규제 품목 가운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는 93.7%, 포토레지스트는 91.9%, 고순도 불화수소인 에칭가스는 43.9%가 일본산이다. 이게 우리가 처한 부품·소재산업의 냉혹한 현실이다. 부품·소재산업 육성의 시급성, 특히 기술 종속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산 대체율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온 게 이미 1990년대 초다. 이번에 일본이 이런 우리의 약점을 콕 집어 파고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삼성전자 LG전자를 필두로 한국산 휴대전화, 반도체, 디스플레이, 가전제품 등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서 자신감에 젖어 부품·소재의 자체 기술력 향상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덩치는 크지만 체질이 허약한 한국 전자산업의 민낯이 드러난 만큼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가 기업과 함께 나서야 한다.

기술패권경쟁, 개발 풍토 조성이 관건

그런 면에서, 한국이 세계 1등 제품 점유율에서 일본은 물론 중국에 비해서도 뒤처진다는 조사 결과는 주목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74개 주요 상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1위를 기록한 제품이 7개로 전년 수준을 유지하는 데 머물렀다. 일본과 중국은 각각 11개, 10개로 늘어난 데 반해 한국만 제자리걸음을 했으니 사실상 뒷걸음질친 셈이다.

특히, 신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0개 품목의 1위 업체가 1년 새 뒤바뀌는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발전용 대형 터빈 시장에서는 히타치가 GE를 제치고 선두에 올랐고 저장장치 분야에도 새 맹주가 탄생했다. 하지만 우리는 화상진단기기나 클라우드 서비스, 암치료약 등 새로 떠오르는 시장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 채 구경꾼으로 전락한 처지다. 

시장지배적 제품과 기술은 단순히 경제를 넘어 안보까지 좌우하는 국력의 핵심 요소다. 갈수록 치열한 글로벌 기술패권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자유로운 경쟁을 허용하고 독보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그렇치 않아도, 일본의 경제 보복을 계기로 일본에 의존해온 한국 부품·소재산업의 근원적 문제점의 일부가 드러났다. 2012년 구미공단에서 불산(불화 수소산) 누출사고로 5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환경 규제를 대폭 강화했는데, 이것이 반도체 소재 국산화(國産化)를 가로막아 왔다는 것이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고로 화학물질관리법 등 규제가 강화돼 취급시설 기준이 기존 79개에서 413개로 5배 이상 늘었다. 국내의 한 소재 가공업체가 불화수소의 자체 생산을 검토했지만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환경규제로 어려우니 포기하라고 권유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국산화 대상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불화수소(에칭가스)로 수출규제 핵심 세 개 가운데 두 개다. 포토레지스트는 연구개발(R&D)을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불화수소는 강화된 환경규제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규제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묻지 마 규제’ 국익 저해

비과학적 공포에 사로잡혀 ‘묻지 마 규제’로 흐르는 일은 경제와 국익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대표적이다.

산업안전 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근시안적 정책은 또 다른 흉기가 된다. 화관법이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 1월부터 본격 시행된다. 그동안 다소 완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독소조항이 많다는 현장 목소리에 정부는 귀 기울여야 한다.

일본의 기술력이 하루아침에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것이 아니다. 세금을 걷어 엉뚱한 데 마구 쓸 것이 아니라 기업, 대학과 함께 머리를 맞대 장기 플랜을 세우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 예산과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소재부품 생태계 구축을 위해 포토레지스트를 포함한 120개 R&D 과제를 선정해 지난해부터 예비타당성 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첫 단계인 기술성 평가도 얼마 전에야 통과했다. 예타 문턱을 넘어선다고 해도 예산 편성을 고려하면 2021년이나 돼야 R&D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는 부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 경제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수출규제 품목의 국산화에 어떤 규제가 가로막고 있는지 서둘러 조사하고 해결에 정부와 정치권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탄력근로제 확대, 승차공유서비스 도입 등의 핵심 현안이 국회에서 몇 달째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위기를 감안해 이번에는 여야가 당리당략을 떠나 규제개혁에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상시 구조조정의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내달 일몰예정인 기업활력법은 대상 확대,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방안이 관철돼야 한다. ‘유턴’은 커녕 해외로 탈출하는 기업이 속출하는 판국에 파격적인 유턴지원법도 시급하다. 투자와 일자리 창출효과가 큰 의료분야에 대한 지원을 담은 서비스산업발전법도 꼭 통과돼야 할 법안이다.

경제 - 구조적 변화 계기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경제를 한 단계 더 도약시켜야 한다. 특정업종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개편하고, 대·중소기업 간 수직적 분업구조는 수평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강소기업을 육성해야 부가가치 높은 소재·부품 개발도 가능한 것이다. 

정부가 비상체제를 가동해서라도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일본의 보복에 대해서는 WTO 제소, 반도체 부품·소재 국산화 지원 같은 단순 대응을 넘어 우리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바꿀 수 있는 근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핵심소재 산업을 육성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구조적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부는 하루빨리 반기업 정책을 청산하고 친기업 정책으로 전환해 본격적인 규제혁파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업 경쟁력을 키워 일본의 보복 파고를 넘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했다. 지금 경제전쟁에 나선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정치 지도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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