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본 윤석열 용산시대 [역사로 보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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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본 윤석열 용산시대 [역사로 보는 정치]
  • 윤명철 논설위원
  • 승인 2022.12.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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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 의식이 공간 지배하면 청와대 불행 무한 반복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논설위원)

종로 청와대에서 용산 대통령실로의 정치권력 이동은 조선왕의 정궁 이전과 비슷한 사례다. ⓒ시사오늘 김유종
종로 청와대에서 용산 대통령실로의 정치권력 이동은 조선왕의 정궁 이전과 비슷한 사례다. ⓒ시사오늘 김유종

역사 라이벌 경복궁과 창덕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나온 메시지다. 강력한 이전 의지가 담긴 이 말은 서울의 권력 이동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해석된다.

청와대에서 용산 대통령실로의 정치권력 이동은 조선왕의 정궁 이전과 비슷한 사례다. 청와대가 경복궁이라면 용산은 창덕궁으로 볼 수 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지만 개국 초부터 외면당했다.

경복궁 외면의 발단은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켜 라이벌 정도전을 제거했고, 경복궁에서 곁가지 방석과 방번을 살해했다. 이방원은 민심을 두려워해 즉위를 잠시 미루고 형인 정종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정종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경복궁을 버리고 옛 수도 개경으로 천도했다. 얼마 후 이방원은 정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다시 한양으로 복귀하지만 경복궁을 외면하고 새로운 궁궐을 건설했다. 바로 창덕궁이다.

이로써 경복궁과 창덕궁의 라이벌 시대가 열렸다. 이른바 ‘양궐 체제(兩闕體制)’다. 태종의 창덕궁 사랑은 각별했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창덕궁에서 정사를 살폈다. 다만 국가 대행사가 있을 때만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를 사용했다.

태종은 창덕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세종에게 양위하기 전 아들의 권위를 세워 주기 위해 창덕궁 개축 공사를 강행했다. 대신들이 막대한 건설 비용과 백성의 노역이 가중되는 등 민생을 이유로 결사 반대했지만 태종은 이를 묵살하고 창덕궁을 정궁다운 모습을 갖추게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용산 이전이 오버랩된다.

세종은 부왕 태종과 정치스타일이 달랐다. 왕권 강화에 몰두해 정적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태종과 달리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는 개국 초 시대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세종도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판단했는지 경복궁으로 집무실을 옮긴다.

세종 이후 경복궁은 라이벌 창덕궁에게 밀렸다. 특히 태종 시즌2 세조는 창덕궁을 확장해 애용했다. 성종은 아예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해 창경궁으로 개명했다.

조선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이유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잦은 정변의 무대가 됐던 경복궁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주변 자연 경관과의 조화로 안식의 장소가 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일전쟁은 라이벌 경복궁과 창덕궁의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주하자 경복궁과 창덕궁은 화마에 희생됐다. 성난 민심이 애꿎은 궁궐을 희생양으로 삼은 셈이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한다. 도주한 군주가 막대한 비용과 노역이 필요한 중건 사업에 나설 경우 분노한 민심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결국 창덕궁 중건을 선행하기로 했다.

버려진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에나 중건 사업이 시작된다. 무려 270여 년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창덕궁도 이괄의 난으로 수난을 겪었지만 경복궁은 역전할 기력이 없었다. 경복궁의 치욕은 창덕궁의 영광이었다. 영정조의 치세도 창덕궁에서 이뤄졌다.

270여 년 후, 치욕의 경복궁이 구세주를 만났다.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은 이씨 왕조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자 경복궁 중건 사업을 의욕적으로 강행했지만 결정적인 패착이 됐다. 당백전 남발로 인플레이션을 자초한 대원군이 천문학적 비용과 백성의 노역을 강요하자 민심은 대원군을 버렸다.

민심이 대원군을 버리자, 역사도 경복궁을 버렸다. 피의 역사로 시작된 경복궁 답게 을미사변을 겪으며 또 한번 피로 얼룩졌다. 결국 국운이 다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면서 경복궁은 망국의 현장이 됐다.

일제는 경복궁의 일부를 조선총독부로 사용하면서 조선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남겼다. 창덕궁도 정궁의 영광을 뒤로 하고, 후원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벚꽃놀이나 즐기는 놀이터가 됐다.

피의 역사로 시작된 경복궁은 정궁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반면 창덕궁은 정궁의 대타로 역사를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정궁의 역할을 다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역사를 보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맞다.

윤석열의 용산시대, 정치개혁 역사적 소명 감당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용산시대를 열었다. 정치권력 공간이 이전한 것이다. 청와대가 건국 후 74년 역사를 겪으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궈냈지만, 역대 대통령의 말로는 비참했다. 경복궁의 역사가 오버랩되는 이유다.

대통령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을 국정 기조로 삼았다. 용산이 공정과 상식의 무대가 돼야 한다. 만약 용산이 ‘불공정과 몰상식’의 무대가 된다면 대한민국과 국민의 불행이 될 것이다. 피와 탄핵이 얼룩진 청와대를 떠날 이유가 실종되는 셈이다.

윤 대통령이 용산시대를 개막한 이유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의식을 창조하기 위함이라면 정치개혁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지 못하고, 구태 의식이 공간을 지배하면 전임 청와대 주인들 신세와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싶다. 윤 대통령 본인 말대로 공간에 걸맞은 의식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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