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텔링] 사라지는 우리말 아파트 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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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텔링] 사라지는 우리말 아파트 상표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10.09 09: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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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이천십구년 시월 구일 제오백칠십삼돌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 즉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을 창제해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인데요. 한글날을 맞아 평소에는 우리가 거의 신경쓰지 않는 우리말 얘기를 하나 해보려고 합니다.

요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한글로 된 간판을 정말 찾기 어렵습니다. 마트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과자며, 옷이며 우리말 제품명이나 상표는 보기 힘듭니다. 즐겨 듣는 노래에서도 영어가 더 많이 나옵니다.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다른 나라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요.

집도 그렇습니다. 우리말 아파트 상표(브랜드)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더 거세졌습니다. 조금이나마 있었던 우리말 아파트 상표마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주요 건설사 아파트 상표들이 온통 외국어 일색이다 제공 각 회사
주요 건설사 아파트 상표들이 온통 외국어 일색이다 제공 각 회사

이천십구년 시공능력평가 기준 상위 십대 건설사들의 아파트 상표는 모두 외국어입니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이 함께 쓰는 아파트 상표 '힐스테이트'는 언덕(Hill)과 품격(state)을 합친 영어 단어 합성어입니다. 지에스건설(GS건설)의 상표는 특별한 지성(eXtra Intelligent)의 줄임말입니다.

포스코건설은 삶의 질이 반올림된다는 의미를 담은 '더샵'(the#)이라는 상표를 쓰고 있으며, 롯데건설은 모그룹 이름 뒤에 성(Castle)이라는 영어 단어를 붙인 '롯데캐슬'을, 에이치디씨현대산업개발(HDC현대산업개발)은 혁신(Innovation)과 공간(Park) 등 영어 단어를 합친 '아이파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올해 십대 건설사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호반건설도 '호반써밋', '베르디움' 등 외국어 단어를 조합한 상표를 쓰고 있으며, 십대 건설사에서 밀려난 에스케이건설(SK건설) 역시 회사명 뒤에 시각(View)이라는 영어 단어를 붙인 '에스케이뷰'(SK VIEW)를 사용합니다.

업계 일위인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아파트 상표는 올 래(來), 아름다울 미(美), 편안할 안(安) 등 한자를 결합한 '래미안'인데요. 다른 업체들과 비교하면 한자 상표가 반가울 지경입니다. 대림산업과 대우건설은 더 반갑습니다. 이들은 각각 영어와 한글을 합성한 상표 '이(e)편한세상'을, '푸르다'에 '공간(GEO)'를 결합한 '푸르지오'를 쓰고 있습니다.

중견건설사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두산건설의 '위브', 태영건설의 '데시앙', 우미건설의 '린', 서희건설의 '스타힐스', 에스엠우방(SM우방)의 '아이유 쉘', 한라의 '비발디', 효성의 '해링턴 플레이스'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도건설의 경우 '유'(U)라는 영어에 권홍사 반도그룹 회장의 딸(권보라) 이름을 합성한 '유보라'(U보라)를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그나마 있던 우리말 아파트 상표도 사라졌습니다. 한화건설은 이천십일년부터 사용하던 순우리말 상표 '꿈에그린'을 내려놓고 지난 팔월부터 아파트·주상복합 통합 상표인 '포레나'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쌍용건설은 순우리말은 아니지만 한자어면서 고풍스런 느낌을 가졌던 상표 '예가'(藝家) 대신 올해부터 '더 플래티넘'을 씁니다.

고급(프리미엄) 주택 상표들 역시 영어 일색입니다. 현대건설은 단 하나라는 뜻을 갖고 있는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 등의 뜻을 내포한 '디 에이치'(THE H)를 이천십오년 출시했고요. 대우건설은 올해부터 고급 상표인 '푸르지오써밋'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림산업의 고급 주택 상표는 '아크로'(이천십삼년)입니다.

하지만 순우리말 아파트 상표를 고수하고 있는 업체들이 있습니다. 금호산업(금호건설)은 입주민들이 자연, 이웃 등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한 삶을 이루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은 '어울림'을 이천삼년부터 사용 중이며, 코오롱글로벌(코오롱건설)은 '하늘'에 주거공간을 의미하는 '채'를 결합한 '하늘채'를 쓰고 있습니다. 임대주택으로 유명한 부영주택은 '사랑으로' 상표를 운영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외국어 사용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금호산업과 코오롱글로벌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상표는 각각 풍요로운(rich) 지식인 사회(intelligentsia) '리첸시아', 매력(Aura)과 자부심(Pride)이 있는 고급 주거시설 '더 프라우'입니다.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로 된 아파트 상표가 난무하고 있는 건 단순히 업체들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주택시장 수요자들이 우리말 상표를 촌스럽다고 여기는 경향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떤 건설사의 경우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상표를 외국어 대신 한글로 표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해당 아파트 입주민들의 반발에 이를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쓸데없는 트집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생활에 가장 중요한 의식주 제품들이 모두 우리말 대신 외국어로 불리고 있는 요즘, 적어도 일년에 오늘 하루만큼은 세종대왕님의 감정에 이입해 감히 불만을 제기해봅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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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2019-10-19 09:48:05
시골 사는 시댁 어른들이 찾지 못하라고 발음이 어려운 이름을 지었다는 우스개가 떠오르네요.

그렇게나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꿈에 그린' 좋고요.
집 옮기려고 할 때 쌍용 '예가' 이름이 좋고 멋져서 가 봤는데, 당시 우리 가족들의 교통상 포기하고 돌아온 적도 있답니다.
한글날 의미있는 기사였네요.
뒤늦게 읽어서 죄송합니다.

toto 2019-10-10 12:53:18
금호 '어울림'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 빵터지네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