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을 단풍의 시작, 설악산 서북능선에서
[칼럼] 가을 단풍의 시작, 설악산 서북능선에서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19.10.1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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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단풍산행의 공식 ‘고생과 환희, 그리고 아쉬움의 교차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한계령삼거리를 지나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바위 능선길을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 최기영
한계령삼거리를 지나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바위 능선길을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 최기영

산을 타다 보니 단풍산행 시기에 대한 나름의 공식을 하나 갖고 있다. 10월 첫 주는 설악산 대청봉 일대 정상부가 단풍 절정기다. 둘째 주는 천불동이나 만경대, 백담사 등 설악산 하부 단풍이 좋고, 지리산 천왕봉 등 정상부는 10월 셋째 주, 그리고 피아골, 칠선계곡, 뱀사골 등 지리산 하부는 10월 마지막 주가 절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북한산이나 도봉산, 관악산 같은 곳은 서울 도심 특유의 열섬 현상 때문에 남부지방의 산들과 단풍 시기가 비슷하다. 그래서 10월 셋째 주나 넷째 주가 되면 단풍이 좋다. 

설악산은 대청봉을 기준으로 동해 쪽을 바라볼 때 보이는 봉우리들이 외설악이고, 내륙 쪽에 있는 봉우리들이 내설악이다. 그리고 내설악과 남설악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 기준이 바로 서북능선이다. 서북능선은 장수대나 남설악 안산에서 올라와 대승령을 거쳐 대청봉을 향해 뻗어 있다. 18km의 능선 길로 국내 종주 등산길 중에는 최고 힘든 코스로 꼽히지만, 설악의 위용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정말 아름답다. 7-8년 전 나도 서북능선 종주를 해본 적이 있다.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한겨울이었는데 어찌나 고생했는지 그 뒤 한동안 설악산과 발을 끊고 살았었다. 그때 얼굴과 다리에 입은 동상 후유증이 겨울만 되면 지금도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설악산을 찾았고 지난 10월 첫째 주, 우리나라 단풍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향했다. 

서북능선은 남설악과 내설악을 구분하는 능선이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에 남설악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서북능선은 남설악과 내설악을 구분하는 능선이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에 남설악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산행은 한계령에서 시작했다. 한계령에서 오르다 보면 대청봉과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한계령 삼거리'가 나온다. 나는 그 삼거리에서 대청봉까지 오르는 길을 생략하고 그곳에서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설악산 서북능선 길로 들어섰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죄다 바위다. 널브러져 있는 바위들 사이에 군데군데 꽂혀 있는 하얀 폴대를 따라 정말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한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오르면 귀때기청봉(1578m)에 도착한다. 귀때기청봉은 한겨울 바람이 하도 매서워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과 대승령 방향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을 바라보면 왜 설악의 가을 단풍이 우리나라 제'1'인지를 알 수 있다. 

서북능선은 그 능선길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능선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지는 내설악과 남설악의 장관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조망이 최고다. 이날도 공룡능선보다 힘들고 아름답다는 용아장성이 있는 내설악과 남설악 방향으로 이어지는 설악산 특유의 암봉들의 모습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절경과 함께 울긋불긋한 단풍의 빛깔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설악의 단풍은 마치 도화지 같은 거대한 바위에 물감으로 군데군데 그려 넣은 수채화 같다. 빼곡한 숲이 몽땅 울긋불긋 물들어 있는 단풍의 절경도 멋지지만 암봉과 어우러진 이곳 단풍의 색감과 여백의 품격은 분명 차원이 다르다.

귀때기청봉의 표지석. 겨울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 귀때기가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최기영
귀때기청봉의 표지석. 겨울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 귀때기가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최기영

그렇게 서북능선에서 사방으로 보는 설악산의 위용을 느끼며 걷다 보면 1408봉이 나온다. 이 봉우리를 지나면 한참 동안 우거진 숲길을 걷는다. 그리고 드디어 대승령(1210m)에 도착한다. 대승령에는 '고생과 환희의 교차점'이라고 쓰인 안내 표지판이 하나 있다. 장수대, 백담사, 대청봉, 십이선녀탕으로 이어지는 길들이 나뉘는 갈림길이 바로 대승령이다. 대청봉에서 출발해 이곳에 도착했다면 고생이 끝난 것이고 대청봉으로 향해야 한다면 생고생 시작이다. 나 역시 이날 대승령에 도착하며 이제야 하산한다고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설악을 내려가야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리고 거대한 대승폭포를 거쳐 나는 장수대로 하산했다. 늘 그렇듯이 이날도 산을 오르는 길은 길지만 하산 길은 늘 짧고 아쉽다. 

대승령을 지나 장수대 쪽으로 하산하며 들른 대승폭포의 모습. 대승폭포는 그 길이가 88m나 된다. 금강산 구룡폭포, 개성 천마산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꼽힌다 ⓒ 최기영
대승령을 지나 장수대 쪽으로 하산하며 들른 대승폭포의 모습. 대승폭포는 그 길이가 88m나 된다. 금강산 구룡폭포, 개성 천마산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꼽힌다 ⓒ 최기영

장수대에 내려오니 이곳에는 서북능선의 그 거대한 불길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그곳은 10월 둘째 주인 이번 주에 오색 찬연한 단풍이 찾아올 것이다. 한여름에 물 한 모금 없는 설악의 서북 능선을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서북능선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고, 한결 유순해진 서북능선의 가을바람은 나의 땀방울을 그렇게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음양오행의 이치로 운명을 설명하는 사주명리학에서 금(金)과 목(木)은 서로를 꺼리는 상극관계다. 금의 기운은 나무를 다치게 하고 목의 기운이 강하면 금은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이 합(合)을 이룰 때가 있다. 그것을 을경합(乙庚合)이라고 한다. 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먹고 자라나야 하지만 을경합을 이룬 나무는 바위에다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형상이다. 이렇게 되자 바위는 그 나무의 뿌리가 뽑히면 갈라지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더욱 단단하게 그 나무를 붙잡는다. 그렇게 둘은 일체가 됐다. 그래서 그 합을 이룬 나무는 목의 기운으로 보지 않고 바위 즉 금의 기운으로 해석한다. 나무는 어떤 것도 무섭지 않은 강력한 힘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사주에 을경합이 든 사람은 강인하고 품성이 도도하다. 

대승령으로 향하며 바라본 귀때기청봉과 이어진 설악산 서북능선의 모습 ⓒ 최기영
대승령으로 향하며 바라본 귀때기청봉과 이어진 설악산 서북능선의 모습 ⓒ 최기영

설악산의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치받고 충돌하던 것들이 결국에는 하나가 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상생의 합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는 그리도 단단한 바위를 지배하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과 고고한 품격을 얻어낸 것이다. 

장수대에서 나는 먼저 내려온 산우들과 함께 감자전에 시원한 막걸리를 먹으며 후미에서 산을 탔던 산우들을 기다렸다. 서북능선 길이 쉽지 않았던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덕분에 우리의 취기는 더해졌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기분 좋은 노곤함이 온몸에 번진 채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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