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 어제와 오늘 [일상스케치(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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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산가족, 어제와 오늘 [일상스케치(83)]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6.18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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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 중단
현재 상봉 신청자 30.8%만 생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학창 시절 6.25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며 기념하여 부른 노래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은 휴전 이후 한반도에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이산가족 상봉 역사

이에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은 전쟁 이후 남북으로 따로 떨어져 연락도 안 되고 생사조차 모르던 가족 및 친지들이 서로 만나고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란 이름으로.

1983년 KBS에서 방영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1985년에 이르러 서울과 평양 간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향방문단은 남북 합쳐 100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 행사로 이 중에서 65명이 상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후 30년 만에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역사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6·15 남북공동선언의 합의에 따른 상봉과 2018년 8월까지 총 21회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 상봉을 통해 각각 20,761명과 3,748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헤어지는 남북 이산가족. ⓒ연합뉴스
헤어지는 남북 이산가족. ⓒ연합뉴스

상봉 신청자 69.2 사망…생존자 67% 80대 이상 고령

그러나 분단 70년을 넘기며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시급하지만 오늘날 남북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한반도 정세가 급랭하며 이산가족 상봉이 5년 가까이 재개되지 않았다.

지난 11일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통일부로부터 받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및 생존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부터 지난달까지 상봉 신청자 중 사망자가 1만 5313명이었다. 연간 사망자가 3400~3700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지난 2018년 8월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 이후 상봉을 기다리던 신청자 중 1만 6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상봉 신청자 13만 3680명 중 9만 2534명(69.2%)이 현재 사망했다. 6·25 전쟁 당시 생긴 실향민들 대부분이 분단 과정에서 고령화되어 가족 친지들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생이별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게다가 생존한 상봉 신청자 4만 1천146명 가운데 31.1%가 90세 이상이다. 80세 이상은 67.0%에 이른다. 이처럼 상봉 신청자 대부분이 고령인 만큼 생존 이산가족은 앞으로 빠르게 줄어들 전망이다. 따라서 촌각을 다투는 절박한 상황인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정찰위성 발사 등으로 당분간 재개 가능성은 희박해 보여 안타깝다.

양 의원은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 23주년을 맞았지만, 지난 5년간 이산가족 상봉에 진전이 없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며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의 노력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사상적 이산가족

그런데… 공간적 지리적 이별만 이산가족일까. 필자는 6.25를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할머니의 구술과 학교 교육 및 미디어 등 간접경험에 의해 6·25를 인식한다.

집안의 어두운 역사를 끄집어 내본다.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 남쪽 끝에 살아 남북 이산가족은 없다. 그러나 한때 남북이 갖는 의미에서 알 수 있는 사상의 차이는 있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됐지만 할머니께서 '사상 부부'라 부른 8남매 중 맏이인 큰고모 부부가 집안의 뜨거운 감자였다.

고모와 고모부는 독립운동 동지로 감옥을 드나들다 연애결혼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 강점기 군 행정 관리셨던 할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딸인 큰고모 면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집안은 친일 명단에 등재된  아버지와 독립운동하느라 감옥을 들락거린 딸을 둔 이산가족이었다.

할머니는 큰 고모부가 일본 명문대 유학시절 한국청년회 회장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큰일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셨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큰 고모부는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엄마의 전언이다.

하지만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은 그 고모부의 이후 진실된 행보였다. 실제로는 해방이 되고 6.25를 거친 후 자유대한민국에서 살던 고모부는 사상적 갈등에 괴로워하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알게 됐다. 큰 고모부는 독립운동가이자 좌익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굴곡의 역사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이었던 모양이다.

고모부의 인생행로를 듣고 오래전  인상적으로 본 드라마 '영웅시대'가 생각났다. 이문열 소설을 김종학 연출로 만들어진 것. 주인공은 인민군 장교로 기억하는데 남한에서 월북하여 조직에 충성했으나 사상적 실망과 괴리로 갈등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6·25 전쟁을  거치며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인물은 우리 가까이에 많이 존재했던 것이다. 혼돈의 역사가 끄는 수레바퀴 아래  어느 가정이나  있을 법한 사상적 대립이라는 후유증이었다.

양분된 이념 갈등

뿐만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 대한민국에 같이 살지만 이념적 양극화도 이산가족이 아닐까. 과거 좌익 우익이라 불리는 이념은 보수와 진보로 불리다 최근에는 통칭 좌파와 우파로 나뉜다. 현재 대한민국 안에서 살면서도 이념이 맞지 않는 국민들이 서로 적대적으로 아웅다웅하고 논란이 뜨겁다.

보수란 이름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분열된 이 상황의 끝은 어디일까. 정국이 대치되고 평범한 국민들도 나뉘면서 친구나 지인들, 속한 조직 속에서도 어떤 정치적 취향인지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는 분위기다. 전쟁의 끝이라는 종교 전쟁을 뛰어넘어 극단적인 이념 분쟁에 이른  세상이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어느덧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듯 남북은 여전히 분단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흔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남북 관계 비극의 대치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아야 했던 것은 죄 없이 혈육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산가족들이었다. 정치와 이념은 달라도 사람과 가족의 정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던 염원을 뒤로하고 작금의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나뉘고 좌우로 나뉘고, 조선시대 사색당파를 뛰어넘는 분열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애통한 절규가 몸 부침 친다. 화합의 그날은 오는가. 얼마 남지 않은 상봉 신청자들이 가족과 하루속히 재회하는 날이 오길 소망해 본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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