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길…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일상스케치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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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라 천리길…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일상스케치㊼]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8.07 14:42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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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황제 남인수, 그는 누구인가
민초들의 애환과 아픔을 위로해
스캔들과 친일 시비는 옥의 티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요즘 가요계 트롯 열풍으로 '트로트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후반 TV조선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미스 트롯 1'이 대흥행을 거두며 부흥기를 맞았다. 이듬해 '미스터 트롯' 역시 큰 성공을 거두며 우승자인 임영웅을 위시하여 미스터 트롯 탑 6는 아이돌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

'미스터트롯' 탑 6. 트로트 전성시대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미스터트롯' 탑 6. 트로트 전성시대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대중가요 속 트로트 위상

트로트 음악의 역사는 깊다. 한국 전체 대중음악의 역사가 실은 트로트와 함께 시작됐다. 무려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애초 도시의 세련된 음악으로 출발해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 '뽕짝'이라는 멸시와 맞물리면서 트로트는 저학력과 가난의 서민음악으로 인식됐다.

또 70년대 이후 젊은 음악인 로큰롤과 포크 그리고 흑인음악에 밀리면서 주류와도 멀어졌다. 그런데 질긴 생명력의 음악이라고 할까.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고 고학력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어 노래방에 가면 트로트 한 가락씩 뽑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는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 주며,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 데 있다.

트로트의 파워는 선거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 여야, 무소속 후보 가릴 것 없이 상당수가 로고송으로 트로트를 빌린다. 유권자 공략을 위해 트로트를 썼다면 그것은 여전히 트로트의 서민적 흡수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 트로트의 화려한 부활로 2022년 도심을 메우는 건 케이팝과 팝뿐만이 아니고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들려오는 음악이 바로 트로트다. 구시대 전용물같던 트로트가 명실공히 전세대에 걸쳐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그렇다 보니 가요사를 더듬어 오랜 100년 전 인물인 가수 남인수가 종종 회자되곤 한다. 진주가 낳은 인물이라니 그 흔적을 찾아봤다.

1970년에 형성된 진주시 식수원 진양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1970년에 형성된 진주시 식수원 진양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예향 진주와 진양호

먼저 진주 진양호(晉陽湖)에 남인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호기심이 동했다. 이에 한 더위를 피해 진양호를 찾았다. 진양호는 1970년 7월에 완성된 낙동강 유역 최초의 다목적댐인 남강댐의 건설로 형성된 호수이며, 경남 진주시의 남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진주시의 주요 식수원이다. 호수의 이름은 진주시의 옛 이름인 '진양(晉陽)'에서 따왔다.

가족단위 나들이 및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2001년 5월에 조성된 가족쉼터와 구 선착장 위에 위치한 남인수 동상과 1984년 12월에 건립된 노래기념비 등이 있다.

가요황제라 불린 가수 남인수. ⓒ연합뉴스
가요황제라 불린 가수 남인수. ⓒ연합뉴스

진주가 배출한 불세출 가수 남인수

1918년 진주(하동?)에서 태어난 남인수는,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한 이래 25년 넘는 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수많은 노래를 불렀고 경남 진주는 가수 남인수의 제2의 고향이자 성장지였다.

대중가요의 굵은 획을 그은 가히 가요황제라고 할 만한 남인수를 배출한 진주는 예향으로 이름 높다. 개천 예술제와 진주 검무를 비롯해 무형문화재가 많고, 최근에는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일찌감치 대중예술가 손목인, 이봉조 등을 비롯하여 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진주라 천리길', 한양에서 남도의 복판인 진주까지 천리 길인데, <목포의 눈물>과 더불어 <진주라 천리길> 가요는 해방 전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진양호 산책로엔 핀 하얀 무궁화. 폭염에 지쳤는지 왠지 처량해보였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진양호 산책로엔 핀 하얀 무궁화. 폭염에 지쳤는지 왠지 처량해보였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민족애환 위로한 슈퍼스타

이러한 진주가 배출한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 히트곡을 남겼고 대표작들은 지금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절망과 실의에 빠졌거나 현실 생활에 지친 민중에게 활력을 실어 주는 마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제강점기부터 그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말로 표현된다.

특히 남인수 최고의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어 남인수는 곧장 최고 가수의 지위에 올랐다. 이른바 공전(空轉)의 대히트였고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당시 언론들은 남인수의 목소리를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요황제 탄생’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온몸으로 역사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고난의 시기를 피눈물로 절규했던 가수 남인수(南仁樹, 1918~1962).  그의 미성은 절망에 빠진 민중을 쓰다듬었고 목소리 자체가 애틋하고 아련한 뭔가가 있다.

1953년 가요황제 남인수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최대의 히트곡 하나를 발표하게 된다. 바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이 노래 가사와 창법에는 오랜 전쟁 속에서 겪었던 피난살이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환도(還都)와 환고향(還故鄕), 이별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있다.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 노래는 음반 판매고 10만여 장을 훌쩍 넘기는 대기록을 세우며 건재를 과시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 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문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남인수의 노래는 대개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다. 민족의 심금을 울린, 그러니 한 세기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슈퍼스타이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나 젊은 층에서는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지만, 그가 남긴 노래와 이야기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여전히 생생한 울림을 주고 있다.

진양호 호젓한 곳에 위치한 남인수 동상과 기념비. ⓒ연합뉴스
진양호 호젓한 곳에 위치한 남인수 동상과 기념비. ⓒ연합뉴스

남인수와 이난영, 해방 전 트로트계 별

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수많은 트로트의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와 20세기 최고 가요로 손꼽히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은 남녀 대표 가수였다. 하늘이 내려준 비음이라고 할 이난영은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통했다.

이러한 유명세만큼이나 생전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던 크고 작은 스캔들, 특히 '애수의 소야곡' 주인공인 가수 이난영과의 사랑은 굉장히 유명하다.

남인수는 16세이던 1934년 목포가요제에 참가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고 서울로 올라와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남인수와 이난영(1916~1965)은 1934년 목포가요제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다만 이들의 사랑은 악단장 김해송이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되어 이난영은 김해송과 1936년 결혼했고, 남인수는 1939년 동료가수 김은하와 결혼한다.

이후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김해송이 6·25전쟁 때 월북하고 남인수는 악단을 운영하며 3남 4녀를 기르는 이난영을 돕다가 1958년 김은하와 이혼하고 사실상 이난영과 재결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0년대 말, 남인수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서 무대에 제대로 오르기조차 힘들어졌다.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가요황제 남인수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특별히 제작한 병실 침대 마이크 앞에 앉았다. 노래 ‘무너진 사랑탑’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몹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취입한 이 곡은 가요황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남인수는 이난영의 헌신적 간호에도 불구하고 1962년 지병인 폐결핵병으로 44세에 이난영의 품에서 작고했다. 조국 잃은 민초들의 서러운 애환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해 준 국민가요황제였던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과 하직한 것이다.

그의 인기만큼 충무로 상가(喪家)에서부터 조계사 앞은 물론, 홍제동 고개 너머까지 추모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남인수의 출세작인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은은히 연주되었다니 슬픈 선율이 참석자의 슬픔을 더욱 고조시켰음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친일인명사전 등재

한편, 가수로서 업적에 반해 사후에 불거진 군국가요 관련 시비 등 남인수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남인수가 남긴 숱한 이야기들은 스타로서 그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지난 1996년 처음으로 진주에서 열린 남인수가요제는 매년 10월 개천예술제 주 행사로 개최돼 지역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활용돼 왔는데 12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현재 진주시는 2008년부터 남인수가요제를 열지 않고 진주가요제로 바뀌어 개최하고 있다. 

이는 친일논란을 빚고 있는 남인수가요제에 대한 사회시민단체들의 폐지 요구가 수 년간 계속된 데다  남인수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역사는 대중 스타들을 오랫동안 홍보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우리 근현대사의 많은 장면에서 권력과 시류에 의해 강제로 ‘의전’으로 이용만 당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남인수의 친일 행적 평가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굴곡진 시대의 도구가 되어 험난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지 않았을까.

대중가요에 대한 최종 선택과 평가는 대중의 몫인 만큼,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이끌었던 남인수에 대한 평가 또한 대중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한국 대중가요 100년 역사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슈퍼스타다. 그에 관한 논란을 너무나 잘 아는 당대 대중이 바로 그의 노래를 선택했고, 그 역사가 쌓여 오늘과 같은 남인수 100년의 의미가 형성되었다.

진양호 한쪽에 기념비와 동상이 있는데 한적한 곳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팬클럽에서는 넓고 탁 트인 곳으로 옮기자고 한다니 충분히 그럴 만큼 아쉬운 측면이 있다. 한때 100년에 나올만한 가수라 칭송을 받던 남인수이기에 허망하게까지 느껴졌다.

돌아오는 발길 눈에 밟힌 진양호 한여름 대나무숲. ⓒ정명화 자유기고가
돌아오는 발길 눈에 밟힌 진양호 한여름 대나무숲. ⓒ정명화 자유기고가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남인수. 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역사의 시간에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로 상처받은 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남인수 동상을 찾은 후 진양호를 돌아나오는 발길은 한시대를 풍미했지만 초라함이 느껴져 서글픔만 남는다. 그 이름만은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사 후 친일 시비에 평가가 엇갈리고 갖가지 부정적 평가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걸 보니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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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22-08-10 11:54:33
정퉁가요의 우수성을 제대로 알리고 있는
#조명섭 남인수 현인 손시향 과같은 전통가요의 대가 들의 노래를 요즈음 들려주어 많은 감동을 주는 #조명섭을 소개합니다

설화수 2022-08-10 09:46:16
남인수님은 잘 몰랐어요 kbs특집 트로트가좋아 에서 왕중왕 #조명섭을 알고 #전통가요를 알게 되었죠 애수의 소야곡은 #조명섭의 단독콘서트 에서 듣고 그 놀라움은 ....
옛노래를 본인의 색깔로 너무 멋지게 소화하는 귀한가수~덕분에 남인수, 현인등 과거 훌륭한 대선배들을 알게되었고 과거음악들의 수준과 품격있음에 감탄하게 되었답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조명섭가수의 경연 우승곡이었답니다 많은사람들이 감탄했던 곡이죠~~

호박사랑 2022-08-10 09:45:43
#조명섭 이라는 젊은 가객의 노래를 듣다보면 내가 어디에 와있는가 착각이 들정도로
그시대의 노래를 마음을 다해 부르는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조명섭 을 눈여겨 보세요

테스 2022-08-10 09:28:58
남인수선생 노래하면 전통가요지킴이
#조명섭 가수를 빼놓을 수 없죠
유튭 sbs의 <<보라고>>에서 조명섭가수의
"추억의 소야곡"을 들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무나 잘 부릅니다
#조명섭 가수 추천합니다~!!

박지현 2022-08-10 09:26:37
이별의부산정거장을 조명섭가수통해 알게되였다
전통가요를지키며 사랑하는조명섭가수가 남인수선배의 뒤를이여대성하길 응원하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