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② ‘신라의 미소’와 ‘천마도’ 편 [일상스케치(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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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② ‘신라의 미소’와 ‘천마도’ 편 [일상스케치(61)]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11.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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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예술적 경지의 작품에 경이
유물을 통해 신라인의 생활상 유추
신분제도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역사는 흐른다. 시대도 변한다. 그런데 무수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게 있는 것 같다. 그건 한 민족 안에서 궤를 같이 하는 문화적 공감대다. 이에 시대를 압축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된 신라의 작품세계는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근했다.

얼굴 무늬 수박새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경주 얼굴무늬 수박새. 보물 제2010호. ⓒ문화재청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경주 얼굴무늬 수박새. 보물 제2010호. ⓒ문화재청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는 일제강점기 경주 영묘사 터(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의 와당이다.

1934년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경주의 한 골동상점에서 이 수막새를 사들이면서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1972년 10월 돌아왔다.

이 수막새는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었다. 왼쪽 하단 일부가 사라졌으나, 선한 눈 아래 살짝 머금은 미소가 아름다워 시대적 괴리감이 전혀 없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신라 왕경에서 출토된 기와. ⓒ정명화 자유기고가
신라 왕경에서 출토된 기와. ⓒ정명화 자유기고가

토기에 보이는 신라인의 모습

토우 장식 뚜껑, 사람모양 토우, 동물모양 토우 등. 신라 5~6세기 작. ⓒ정명화 자유기고가
토우 장식 뚜껑, 사람모양 토우, 동물모양 토우 등. 신라 5~6세기 작.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 토우들은 대부분 경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토우란, 사람이나 동물 모양을 손가락 크기만큼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을 말한다.

신라 무덤에서 말, 오리 같은 동물은 물론  배, 수레, 뿔잔 등 일정한 물건을 본떠서 만든 상형 토기가 종종 발견되었다. 상형토기는 장례를 치를 때 술 같은 액체를 담아 따르는데 쓰였던 것으로 의식이 끝난 후 사후세계를 위해 무덤에 함께 넣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굽다리접시나 긴 목 항아리 등에도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토우를 붙이거나 갖가지 무늬를 새겨서 장식하기도 했다. 단순하지만 사실적으로 표현한 상형토기나 토우 등에서 신라 사람의 생활 모습과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다.

토우 장식 항아리. 5세기 작. 보물 195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토우 장식 항아리. 5세기 작. 보물 195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위 토우 장식 항아리는 신라 미추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토기에 토우를 장식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징적인 동물 토우로 장식해 다산과 풍요 등을 기원했다.

토우를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기록의 근거를 들어 지증왕 때부터로 보고 있다. 신라 22대 지증왕 때 '순장' 풍습을 폐지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순장 풍습이 존재해, 산 사람을 죽이거나 산 채로 무덤 주인인 왕과 함께 묻었다. 순장을 폐지하면서 사람 대신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묻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토우들이 발견된 무덤들이 지증왕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새 모양 토기를 왜 무덤 안에 넣었을까

새 모양 토기 주전자. ⓒ정명화 자유기고가
새 모양 토기 주전자. ⓒ정명화 자유기고가

당시 신라인들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영매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죽은 이의 평온과 영혼의 승천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새 모양 토기를 장례의식에 사용한 후 무덤에 넣었다.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이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천마총 환두대도(보물)

천마총 환두대도(고리 자루 큰칼). 보물 621호. 봉황장식큰칼. 세고리장식큰칼. ⓒ정명화 자유기고가
천마총 환두대도(고리 자루 큰칼). 보물 621호. 봉황장식큰칼. 세고리장식큰칼.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 큰칼은 천마총이라 불리는 황남동 고분 155호 무덤에서 1973년 출토된 신라시대 유물이다. 황남동 고분 155호는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환두대도(天馬塚 環頭大刀)의 칼집과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얇은 금동을 입혔다. 칼 중에서 손잡이 끝부분에 둥그런 고리가 붙어있고 그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으로 보이는 새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어 그 소장자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 주는 칼이다.

황금보검

'경주 계림로 보검'.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 보물 635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주 계림로 보검'.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 보물 635호.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주국립박물관에 진열 중인 유물 중에서 이색적인 작품이 눈에 띄었다. 바로 유럽 혹은 중동 지역에서 만들어진 5~6세기 신라시대의 검이다. 문화재청이 정한 정식 명칭은 '경주 계림로 보검'이지만 초창기 언론과 TV 보도 탓에 '신라 황금보검'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다.

철제 칼날과 나무 칼집은 1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삭아서 거의 없어졌지만, 황금, 가넷, 마노 등으로 만들어진 보석 장식부는 온전히 남았다. 전체 길이 36.8 cm, 최대 너비(폭) 9.05 cm에 이른다.

신라 시대의 흔한 환두대도와 그 형태와 문양이 판이하게 다른데, 한반도나 동아시아가 아닌 서역에서 제작한 검이 확실해서 주목을 받았다.

검을 장식한 보석은 동유럽 원산 석류석이고, 소용돌이 문양 또한 불가리아에서 출토된 트리키아시대 유물과 흡사했다. 따라서 신라의 대외 교류를 보여주는 보물로, 이 귀한 보검의 주인은 신분이 매우 높은 신라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도 장니

천마도의 출현.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에서 발굴단원들이 천마도 장니를 수습하고 있다. ⓒ연합뉴스
천마도의 출현.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에서 발굴단원들이 천마도 장니를 수습하고 있다. ⓒ연합뉴스
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로 지정.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로 지정.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천마) 그림이다. 장니는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를 칭하는 것이다. 가로 75㎝, 세로 53㎝, 두께는 약 6㎜로 1973년 경주 황남동 고분 155호 분(천마총)에서 발견되었다.

천마도가 그려져 있는 채화판은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맨 위에 고운 껍질로 누빈 후,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 것이다. 중앙에는 흰색으로 천마가 그려져 있으며, 테두리는 흰색·붉은색·갈색·검은색의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천마는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다. 다리 앞뒤에 고리 모양의 돌기가 나와 있고 혀를 내민 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준다. 이는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천상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5∼6세기 신라시대에 그려진 천마도의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이다. 그러므로 신라 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문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마도는 몇 안 되는 신라의 회화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크다.

이와 같이 예술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장벽이 없다. 일상에서 미와 효용성을 추구하고 삶을 살아내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특히 천년왕국 신라의 역사적 유물들은 문화적 가치 이상으로 경이로움을 안겼다. 따라서 국립경주박물관 탐방은 지난 역사적 작품을 통해 신라인들의 발자취와 생활양식을 탐구하는데 좋은 기회가 됐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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