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효종의 북벌론과 양정철의 총선전략
[역사로 보는 정치] 효종의 북벌론과 양정철의 총선전략
  • 윤명철 기자
  • 승인 2019.08.03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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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연구원은 총선의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현안 해결을 위한 묘안을 제시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양정철 원장의 민주연구원은 총선의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현안 해결을 위한 묘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사진제공=뉴시스
양정철 원장의 민주연구원은 총선의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현안 해결을 위한 묘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사진제공=뉴시스

효종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던 조선 역사상 최초의 군주다. 비록 대군의 신분으로 포로가 됐지만, 후일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효종이 청나라에 가졌던 적개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원래 효종은 국왕의 자리에서 오를 수 없었다. 맏형인 소현세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부왕인 인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같은 포로 신분이었지만 현지에서 청의 국력을 체험하자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소현세자는 청 황실이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 참여해 청의 실권자인 도르곤과 친분을 쌓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 등 조-청 양국 간 외교 현안을 현명하게 처리했다. 특히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고도 친명 외교를 굽히지 않던 인조와 서인정권을 대신해 청과의 조율에 앞장섰다. 또한 소현세자는 청에 머물던 독일의 선교사이며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교류하며 서양의 과학기술과 선진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소현세자는 자신이 국왕에 오르면 새로운 조선의 미래를 구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인조와 서인정권이 소현세자의 청에서의 행적을 곱게 보지 않았던 점이다. 인조는 혹시라도 청이 자신을 퇴위시키고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교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한다. 권좌에 위협을 느낀 비굴한 군주 인조는 자신의 아들마저 미워했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6월 27일에 따르면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고 전한다.
 
결국 소현세자는 본국으로 복귀한 지 두 달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인조실록> 같은 날 기사에 따르면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며 독살 의혹을 제기했다.
 
현재까지 소현세자의 급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인조와 서인정권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다. 인조의 분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도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물론 소현세자의 아들들도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제명에 죽지 못했다. 후일 역사는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을 인조의 비정한 권력욕의 희생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형인 소현세자의 급사로 뜻하지 않게 대권을 이어받은 효종은 청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마침 조선의 백성들도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서인 정권도 전쟁의 참화에 대한 책임론을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리고자 했다.
 
효종과 서인정권의 선택은 ‘북벌론’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국력은 북벌을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로 전후복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제력과 잦은 정변으로 정치력이 실종된 상황에서 청에게 복수할 국력이 없었다.
 
아울러 당시 청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한 명 대신 중원의 패자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효종과 서인 정권의 눈에는 세계 최강국에 근접한 청의 국력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게 북벌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반면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북벌보다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생안정이 더 절실했다. 현실성이 없는 명분론에 사로잡힌 효종과 서인정권은 백성의 피맺힌 절규는 외면하고 북벌을 적극 추진했지만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죽자 중단됐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확전되고 있다. 하지만 여권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배포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 규제로 불거진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논란을 일으킨 민주연구원은 현 여권의 초실세인 양정철 원장이 관장하고 있다.
 
한일 무역전쟁은 제로섬 게임이 돼서는 안 된다. 양정철 원장의 민주연구원은 총선의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현안 해결을 위한 묘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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